“도널드 트럼프 차기 행정부에 대북 정책을 조언한다면 ‘협상을 재개하라’고 말하겠습니다. 대신 같은 전략을 활용해선 안 됩니다. 6자회담이 12년을 넘겼지만 북한 핵 개발을 막지 못했습니다. 북한 핵 전략에 맞서는 방법은 핵 위협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윌리엄 페리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89·사진)는 14일 한국을 방문해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정권 보장과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경제는 희생해도 좋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이해해야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 미국 국방장관을 지낸 북한 문제 전문가로 최근 내놓은 회고록 《핵 벼랑을 걷다》(창비)의 국내 출간을 맞아 방한했다. 회고록에는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이던 그가 군사기술 전문가를 거쳐 미국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페리 전 장관은 1994년 한반도에 북핵 위기가 고조됐을 때 영변 핵시설 타격까지 검토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그를 두고 ‘전쟁광’이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는 외교적 해법을 중시했다고 강조했다. “타격 계획은 제 책상 위에 있었지만 실행 계획은 없었습니다. 저는 외교적 해법을 강조했습니다. 대화는 항상 협상 수단이 될 수 있으니까요.”

1998년 북한이 노동, 대포동 같은 중·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자 갈등은 다시 불거졌다. 당시 대북정책조정관이던 그는 임동원 통일부 장관, 가토 료조 일본 외무성 심의관과 함께 ‘페리 프로세스’를 내놓았다. 북한 핵시설 해체를 위해 당사자들이 점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방법론이었다.

페리 전 장관은 트럼프 당선자가 선거 운동 기간에 제시한 한·일 핵무장 용인,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100% 주장에 대해선 “아직 트럼프의 정책 기조를 판단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4~6주간 인선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며 “그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본다”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이어 “한국과 일본이 핵을 보유한다면 큰 실수이며 주한미군이 4만명 넘게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확장 억제력은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현재로선 북한 핵무기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므로 협상으로 핵 위협을 줄여가는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추가 핵 개발, 성능 향상, 기술 이전을 포기한다면 경제적 이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미·일은 조건 없이 협상을 개시하고 필요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도 참여해야 합니다. 현재로선 설득력 있는 제안이 없어도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