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A사에서는 연말마다 ‘이메일 백일장’이 열린다. 인사 관련 소원수리를 이메일로 받기 때문이다. 모든 사원이 ‘소설가’가 되는 순간이다. A사의 한 간부는 “이메일만 보고 있으면 모든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요즘 회사가 어려운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고 현 부서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만 어필해선 안 된다. 그동안 이 부서에서 얼마나 많은 걸 배웠는지, 그런 기회를 준 상사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절절히 표현해내는 ‘센스’도 필요하다. 김 대리는 “정말 부서가 마음에 들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떠나려 하겠느냐”며 “인사철에만 상사와의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는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눈물겨운 글짓기에도 ‘탈출’에 성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대부분이 받아드는 건 아래와 같은 직속 상사의 답장. “김 대리, 수고 많았어. 하지만 아직 우리 팀에서 배울 게 많아. 팀도 당신을 필요로 하고. 1년만 참고 일해줘.”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인사철이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김과장 이대리들의 마음은 싱숭생숭하기만 하다. 올해는 ‘만년 과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최악의 팀장과 헤어질 수 있을지 등 기대 반, 근심 반이다. 직속 상사의 평가에 의존한 과거와 달리 ‘동료평가제’ 등이 도입되면서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졌다. 김과장 이대리들의 치열한 ‘물밑 작전 현장’을 들여다봤다.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토익 공부하랴, 회식 따라가랴

부장 승진 대상자인 삼성전자의 최 차장은 지난 6월부터 퇴근 후 모든 약속을 끊고 ‘수험생 모드’에 들어갔다. 어학원을 다니며 삼성그룹의 공식 영어시험인 OPIc을 준비해왔다. 내년 3월 삼성전자는 CL(Career Level:경력개발 단계)이라는 새 인사제도를 도입한다. 연공서열주의 중심에서 직무·역할 중심으로 바꾸는 것. 제도 개혁을 앞둔 삼성전자는 내년 3월1일 마지막 부장·차장·과장 등 승진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승진에서 누락되면 더 이상 승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게 사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지금까진 한두 번 물 먹어도 그다음엔 승진시켜주겠지란 희망이 있었어요. 하지만 새 직급체계는 능력 있는 사람을 빨리 승진시키기 위한 선발형 제도입니다. 한 번 승진이 안 된 사람은 계속 안 될 거란 인식이 파다합니다.”

대기업 영업팀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는 최근 2개월간 일하기 좋은 팀을 찾느라 고생했다. 지난 4년간 일한 영업팀 업무가 맞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팀장의 독단적 팀 운영과 팀원 간 불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던가.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그였지만, 다른 팀이 회식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무조건 따라갔다. 정보 수집을 위해 담배를 피우러 가는 일이 잦아졌고, 조금이라도 빨리 인사 정보를 얻으려 메신저엔 불이 났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그는 자신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부서 이동을 위해 여기저기 아부하고 다닌다’는 것. 그는 억울하기만 하다. “조금이나마 나은 환경에서 근무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배신자’ 취급을 당하니 속상합니다. 조직원이 일하기 좋은 부서를 찾아가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요.”

‘인간관계’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인간관계’가 발목을 잡기도 한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이 주임은 지난 2년간 함께 일한 선배와 말을 섞지 않는다. 술자리에서의 사소한 언쟁 때문이다. ‘엮이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이 주임은 최근 난관에 봉착했다. 그 선배가 인사팀으로 발령난 것. 이 주임의 회사에서 인사팀은 고과 등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힘센 부서다. 이 주임은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건데 지금이라도 가서 사과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한탄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정 대리는 동료들에게 커피를 사는 일이 잦아졌다. 평소 ‘마이웨이’를 고집한 것과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이유는 최근 시험 도입된 ‘동료평가제’ 때문. 함께 일하는 팀원끼리 평가하는 제도다. 업무 적극성, 구체적 성과, 목표 달성 기여도 등을 따져 평가하라는 게 회사의 방침이지만 실제론 ‘인기투표’와 다름없다는 게 정 대리의 말이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사내 정치를 못 하거나, ‘적’이 많은 스타일은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어요. 동료들끼리 윗사람, 아랫사람, 동료 눈치까지 봐야 하는 피곤한 인생이라고 자조적인 말들이 나옵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장 대리는 지난달부터 출근시간을 30분 앞당겼다. 곧 있을 인사고과에서 좋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다. 지난해 장 대리는 1년 입사 선배가 ‘탈(脫)대리’를 하지 못하는 걸 눈으로 확인한 터라 더 조급해졌다.

문제는 그런 장 대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동료가 은근슬쩍 훼방을 놓고 나선 것. 지난해 과장 승진에서 누락된 김모 대리가 유독 심하다. 김 대리는 부서원들 앞에서 “일찍 출근한다고 일 열심히 하는 거 아닌데”라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사원급 앞에서 “요즘 장 대리가 고과 잘 받겠다고 ‘반짝’ 일찍 출근하는데 저렇게 보여주기식으로 일하면 안 된다”고 험담하기도 했다. 보고서를 기한보다 하루 일찍 낸 어떤 날엔 “고과 잘 받으려고 용쓰는구나”란 소리까지 들었다. 결국 장 대리는 이른 출근을 포기했다.

대학입시 뺨치는 ‘눈치작전’

중소기업 4년차 사원인 김모씨는 요즘 인사고과를 앞두고 고민이 많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먼저 내야 하는데 몇 점으로 써내야 할지 감이 없어서다. 이 회사는 자기 평가 점수와 팀장, 상무가 평가한 점수를 종합해 최종 인사고과를 매긴다. 문제는 며칠 전 경영기획팀장으로부터 받은 단체 이메일. 요지는 “자기 평가가 1차 고과자(팀장) 평가와 차이가 크지 않을 때 정상적 결과가 산출된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결국 ‘상사가 생각하는 점수가 있으니 스스로 높은 점수를 적어 내지 마라’는 것 아니겠느냐”고 털어놨다. 그는 “20명도 채 되지 않는 회사에서 절반이 승진 대상자”라며 “회사 분위기도 좋지 않아 절반이나 승진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만 하다”고 덧붙였다.

인사철만 되면 벌어지는 ‘눈치작전’이 남의 일인 이도 있다. 보험사 신입 사원 한씨 얘기다. 회사가 워낙 폐쇄적이라 인사철이 돼도 관련 얘기가 돌지 않는다. 임원 등 높은 자리는 가끔 하마평이 돌기도 하지만, 다른 자리는 발표 전까지 전혀 알 수 없다. “다른 회사에선 인사철이면 물밑작전도 치열하다는데 우리 회사엔 그런 게 없어요. 신경을 안 써도 되는 점은 좋지만 답답하기도 합니다.”

고재연/윤아영/노경목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