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상 속 만연한 갑질
한경 기자 4인의 생생 체험
다산콜센터, 갑질은 수화기를 타고
성희롱은 일상…154차례 전화 건 스토커
상담사 중 우울증 안걸려 본 사람 없어
지난 6일 오후 서울 신설동 ‘120다산콜센터’. 기자는 규정상 직접 수화기는 들지 못하고, 상담사의 상담 내용을 같이 들었다. 얼마 안 돼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독감 예방주사를 어디서 맞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상담사가 노인의 거주지를 묻고 인근의 독감예방접종 지정병원을 안내하자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그는 “나한테 돈 내게 하려고 하느냐”며 “왜 보건소는 안내 안 하느냐”며 소리를 질렀다. 상담사가 안내한 병원에서도 무료 예방접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지만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호통은 10분 넘게 이어졌다. 상담사는 “이 정도는 일도 아니고 성희롱도 다반사”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콜센터에 대한 갑질은 악명 높다. 공공기관이고 일반 기업이고 가리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붓는 ‘스트레스해소형’부터 공공연한 성희롱, 부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스토커형’까지 가지가지다. 50대 박모씨는 한 보험사 콜센터에 모두 154차례에 걸쳐 전화를 걸어 폭언과 욕설을 일삼다가 지난달 검거됐다. 그는 보험금 지급이 하루 늦었다는 이유로 “5만원 상당의 기프티콘을 달라”고 요구했다. 상담원이 난색을 보이자 다짜고짜 “싸가지 없는 ×, 모가지를 자른다” 등의 폭언을 퍼부었다. 경찰 조사 결과 박씨의 폭언은 2011년 2월부터 지난달까지 5년여간 이뤄졌다. 피해를 본 콜센터 상담원만 13명에 이른다.
편의점, 손님은 王이지만 진상고객은…
담배 사는 고객에 신분증 보여달라니
“아 씨×, 답답한 ××들…” 욕부터
지난 5일 서울 종로의 한 편의점. 오후 7시께 스무 살이 안 돼 보이는 젊은 남성이 들어왔다. 담배 한 갑을 주문하길래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옆 건물 PC방에 가방을 두고와 없다”면서 “성인이 맞으니 그냥 달라”며 인상을 썼다. 옆자리 아르바이트 학생이 “요즘 경찰 특별단속 기간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자, 젊은 남성은 아르바이트생과 기자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아 씨×, 답답한 ××들…”이라고 욕설을 내뱉은 뒤 돌아서 나갔다.
한숨을 내쉰 아르바이트생은 이런 갑질이 하루에도 수차례 벌어진다고 손을 내저었다. 어제는 한 40대 남성이 컵라면 하나를 산 뒤 아르바이트생에게 “야. 뜨거운 물 좀 따라봐. 뭘 쳐다보느냐. 이 ××야”라고 해 화가 치밀었으나 그냥 직접 온수기에 가 따라줬다고 했다.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와 동전을 꺼내 계산대에 던지는 일도 허다하다고 했다.
한번도 안맞아 봤으면 마트직원 아냐
계산 안한 男 “날 의심해?” 시비 걸어
“오늘은 조용…종처럼 대하지 않았으면”
지난 5일 기자가 한 대형마트 고객만족센터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가 들렸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는 장을 본 뒤 계산하지 않고 나가다가 매장 직원이 “계산하셨느냐”고 묻자 “사람을 의심하느냐”고 고함을 지르며 고객만족센터로 왔다. 고객만족센터에선 “손님한테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냐”며 항의했다. 그의 장바구니에는 아이스크림, 돼지고기 등 23만원어치 식품이 들어 있었다. 결국 경찰을 불러 폐쇄회로TV(CCTV)를 확인하자 뒤늦게 “계산한 줄 착각했다”며 “지금 계산하겠다”고 했다. 경찰관 한 명이 “절도는 큰 범죄”라고 경고하자 남성은 뒤늦게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현장 직원은 “절도를 하다 들켜도 직접 증거를 들이밀지 않으면 오히려 더 세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직원들은 “그래도 오늘은 평화로운 편”이라고 했다. 직원들이 가장 자주 맞닥뜨리는 갑질은 황당한 환불 요구. 지난달엔 수박을 한 조각만 가지고 와 “맛이 없어 도저히 못 먹겠다”며 수박 한 통 값을 환불해 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누가 보더라도 억지인 걸 아는데 일단 고함부터 지르는 게 일부 소비자들의 행태다.
대형마트 직원들은 무엇보다 종처럼 하대하는 듯한 태도가 가장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한 직원은 “어떤 고객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을 무조건 하찮게 여긴다”며 “일단 반말부터 하고, 툭하면 태도가 좋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고 말했다.
점잖은 사람도 민원실만 오면…
30대 女 “내가 얼마나 바쁜데…” 삿대질
“놀고 먹나” 임신한 공무원 멱살·폭행도
지난 7일 오전 서울 중구청 1층 민원실. 기자는 혼인신고 등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하는 접수창구에서 서류작업을 돕는 일일 체험에 나섰다. 업무 설명을 듣고 있던 와중에 옆 창구에서 소란이 발생했다.
“남편과 내가 결혼했다는 데 무슨 증인 서명이 필요하냐?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증인 서명 받아서 다시 구청에 오라는 거야?” 3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구청 여직원에게 삿대질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현행법상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선 본인과 배우자의 신분증명서, 인감증명서뿐 아니라 증인란에 성인 두 명의 서명이 필요하다. 이 여성은 이 같은 사실을 설명하는 구청 여직원에게 다짜고짜 반말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결국엔 “공무원들이 내가 낸 세금 받아먹고 놀고먹는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민원실을 빠져나갔다.
민원실 공무원들은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이라 갑질 축에도 끼지 못한다”며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경우만 하루에도 수차례”라고 말했다. 올초엔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받으러 온 한 60대 여성에게 인적사항을 물어보자 여성 공무원의 멱살을 잡고 폭행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여성 공무원은 당시 임신 5개월이었다.
60~70대뿐만 아니라 20~30대 청년들도 민원실만 오면 반말을 하거나 목소리부터 높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구청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었다.
글=강경민/마지혜/이수빈/황정환 기자
사진=신경훈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