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렐라이언덕
로렐라이언덕
독일 뤼데스하임에서 차를 타고 라인강변을 따라 30㎞를 달리면 로렐라이언덕이 나온다. 수면 위로 133m 솟은 이 언덕은 벨기에의 오줌싸개 소년상, 덴마크의 인어공주상과 함께 ‘유럽의 3대 허무 명소’로 불린다. 기대를 잔뜩 안고 왔지만 막상 로렐라이 조각상 외에는 특별히 볼 게 없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340만명가량이 이곳을 찾는다. 금발의 소녀 로렐라이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전쟁터에 나간 소년을 기다리다 몸을 던졌다는 로렐라이의 사랑이야기와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을 바라보다 선박이 좌초한다는 전설에다 민요처럼 애창되는 ‘로렐라이의 노래’가 얽혀 관광객의 발길을 잡아매고 있다. 스토리의 힘이다.

스토리로 먹고사는 도시

가마쿠라시
가마쿠라시
독일만이 아니다. 스토리 관광은 세계적 추세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의 소도시 가마쿠라시는 30~40대 한국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다. 이곳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농구 만화 ‘슬램덩크’의 실제 배경이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된 슬램덩크는 일본에서만 1억2000만부 이상 팔렸다. 어린 시절 이 만화를 보고 자란 이들이 추억의 명소를 찾아가면서 관광지로 떠올랐다. 1902년부터 달리기 시작한 전차 ‘에노덴’이 가마쿠라 전차역에 멈춰 서는 것도 만화 속 장면이었다. 주인공 강백호와 채소연이 걷던 철길 건널목은 사진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슬램덩크에서 북산고의 라이벌 학교인 능남고는 가마쿠라고등학교를 모델로 했다.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은 이곳에서 정신없이 ‘인증샷’을 찍는다.

줄리엣의 집
줄리엣의 집
이탈리아 북부 작은 도시 베로나는 셰익스피어의 명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인구 26만명인 이곳에는 해마다 5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13세기 여관 건물을 개조한 ‘줄리엣의 집’에만 한 해 100만명 이상이 다녀간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보스턴은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로 유명하다. 미국의 가장 오래된 공원인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에서 출발해 길 바닥에 표시된 붉은 선을 따라 걷다 보면 옛 주 의사당, 그래너리 공동묘지, 보스턴 학살 사건 터 등 16개의 유명한 역사유적지를 두루 볼 수 있다. 총 길이가 4㎞로 부담 없이 걸으며 보스턴과 미국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 도시 유적에도 얼마든지 스토리를 입힐 수 있다는 얘기다.

전통에 스토리를 입힌 전주 한옥마을

한국에서도 스토리를 입히는 작업이 한창이다. TV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남이섬이 대표적이다. 그럴듯한 스토리가 더해지다 보니 남이섬은 동남아시아 관광객의 필수 방문코스로 자리잡았다.

전주 한옥마을도 한옥에 전통이라는 스토리를 입혀 성공한 경우다. 한옥마을이 문을 연 것은 2006년. 초기엔 전통 건축양식인 한옥만을 내세웠다. 이후엔 한지, 한식, 한복 등과 연계한 스토리를 개발해 ‘K컬처’ 체험공간으로 확대했다. 전통문화 스토리를 활용한 상설 공연도 했다. 그 결과 방문객은 2006년 100만명에서 작년엔 600만명을 넘었다. 이 중 40% 이상이 외국인이다. 외국인 관광객 사이에선 ‘한옥의 도시’로 통할 정도가 됐다. 박양우 중앙대 교수(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는 “한옥이라는 건축양식에 한국의 전통, 과거, 역사, 순수, 느림 등 신비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스토리가 가미돼 있다는 점이 전주 한옥마을의 성공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스키에 지역 스토리를 입히는 상품도 나오고 있다. 신천지여행사가 지난달부터 판매 중인 올겨울 강원도 스키여행 상품은 1인당 130만~150만원(3박4일 기준)이다. 중국인 관광객(유커)을 대상으로 한 초저가 스키여행 상품(35만~40만원, 항공료 포함)에 비하면 상당히 비싸다. 그런데도 벌써 중국 스포츠 동호회 5개팀 500여명이 신청했을 만큼 인기가 높다. 스포츠에 스토리를 입힌 것이 주효했다. 이 여행사 조창희 대표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정선 알파인 코스에서 스키를 즐기고 5만원권에 등장하는 신사임당의 본가인 강릉 오죽헌을 방문하도록 스토리를 결합한 것이 인기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그만그만한 지역 축제, 스토리가 없다

하지만 아직이다. 한국 관광의 스토리작업은 초보 수준이다. 경남 하동의 박경리 토지 마을, 강원 봉평의 이효석 문화 마을, 경기 양평의 황순원 소나기 마을, 강원 춘천의 김유정 마을, 전남 벌교의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등 소설을 바탕으로 한 테마 마을과 영화촬영지 등이 이름을 알리고 있지만 아직은 국내 관광객이 주로 찾는 데 그치고 있다.

독특한 스토리를 입힐 수 있는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꼽히는 지역축제와 각종 행사도 마찬가지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축제와 행사는 2014년 말 기준 1만5246개에 이른다. 정부 예산만 1조1423억원이 투입됐다.

하지만 지역 스토리를 담은 대표적인 축제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촌지역에 특색을 입혀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며 조성한 농촌테마파크 사업도 스토리를 입힌 성공모델을 찾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개장 중인 35개 농촌테마파크 중 하루평균 방문객이 10명도 안 되는 곳이 11개에 이른다. 2014년 개장한 충남 예산 광시한우 테마공원은 사업비 59억원을 투입했지만, 지난 2년간 방문객 수는 2000명에 그쳤다. 하루평균 2.7명꼴이다. 외국인 방문율은 제로에 가깝다.

유정우/최진석 기자 see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