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다부동 전투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한 달 사이에 목포 진주 김천 포항까지 휩쓸었다. 남은 건 낙동강 이남뿐이었다. 김일성은 임시수도 대구를 향해 보병 3개사단과 전차사단 등 3만여 병력을 집중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광복절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며 총공세를 펼쳤다. 일명 ‘8월 공세’였다. 6·25 최대 격전으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가 26일간(8월3~29일) 벌어졌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유학산) 일대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요충지였다. 육군 제1사단이 다부동 전선에 투입됐을 땐 인민군이 이미 수암산과 유학산을 점령한 후였다. 낙동강 연안전투를 끝내자마자 도착한 장병들은 군장을 풀 틈도 없이 공격에 나서 수암산을 되찾았으나 유학산 탈환에는 실패했다. 유학산은 가장 높은 고지여서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전황은 최악이었다. 14일에는 사단 주저항선이 뚫리면서 328고지와 303고지가 적에게 넘어갔다. 격전 끝에 유학산의 적 1500여명을 사살했으나 인근 673고지가 역습을 당하는 바람에 또다시 탈환에 실패했다. 그 와중에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8일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졌다. 결국 정부를 부산으로 급히 옮겨야 했다.

21일이 돼서야 일말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부동 계곡에 미군 전차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워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자 미군 전차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최초의 전차전이었다. 쌍방의 철갑탄이 5시간 동안 불꽃을 튀겼다. 미군 병사들은 불덩이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계곡으로 날아가는 게 볼링공 같다 해서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불렀다. 전황이 불리해질 때면 백선엽 장군이 권총을 들고 선두에 나서 장병들을 독려했다.

다부동 전선의 중요성은 인민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필사적이었다. 양측 모두 사활을 걸었다. 국군은 1만5000여명 중 전사자 2300여명을 포함해 사상자 1만여명, 인민군은 3만여명 중 전사자5690명 등 2만4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얼마나 치열했으면 1차 대전 때 독일로부터 파리를 구한 ‘베르? 전투’(양측 30만명 사망)에 비유됐다.

그때 마지막 일격으로 승리를 결정지은 날이 66년 전 어제.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을 것이다. 국군과 미군의 첫 연합작전이었던 점도 의미심장하다. 피로 지킨 대한민국, 한미동맹의 상징이 곧 다부동 전투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