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 논쟁은 1990년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아키히토의 장남 나루히토 왕자는 2001년 딸을 낳긴 했지만 아들을 보지 못했다. 일본 언론이 들끓었다. 이번 기회에 여왕을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편과 남성 계승의 혈통을 바꾸면 일본의 왕 제도가 사라질 것이라는 편으로 나뉘었다. 집권 자민당 내부에서도 편이 갈렸다.
일본 총리였던 고이즈미는 여왕제를 인정해 왕위 계승순위는 남녀를 불문하고 첫째 자녀를 우선으로 한다는 보고서를 2005년에 의회에 제출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왕실 규정을 개정하려 했지만 아키히토의 차남인 아키시노 왕자가 아들을 얻었다는 소식에 법안은 보류됐다. 2011년에는 민주당 노다(野田) 정권이 여성 왕족이 결혼하더라도 왕족 신분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201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출범하면서 이런 논의는 물밑으로 사라졌다. 아베는 평소에 남성 전통의 왕실이 무너질 위험성을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어제 아키히토 일왕이 살아생전에 왕을 그만두고 왕위를 나루히토에게 양위할 것임을 내비쳤다. 일본 언론들은 일왕 퇴위기사로 도배질했다. 왕실 규정에는 생전 퇴위에 대한 조항이 없다고 한다. 때마침 아베 정권이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하면서 평화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무르익고 있는 마당이다. 평소 ‘평화의 심벌’이기를 원했던 아키히토가 아베의 개헌을 저지하려고 퇴위라는 극약 처방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아키히토는 아베와 달리 지금의 평화헌법을 지지하고 있다. 일왕의 양위가 아베와의 갈등 과정에서 표출됐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왕에 대한 시비가 다시 일어날 조짐이다. 아키히토로서는 생전에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퇴위 카드를 던졌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일왕의 후계구도를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이 일본 정치계에 다시 감돌고 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일본 관료들의 속내도 들린다. 세계 곳곳에서 여성 대통령과 여성 총리가 잇달아 나오는 세상이다. 일본도 이런 분위기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