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9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갈매기’. 국립극단 제공
오는 29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갈매기’. 국립극단 제공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갈매기’를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원작의 인물들이 저렇게 단조롭고 메말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대표작을 국립극단이 제작하고, 루마니아 출신 펠릭스 알렉사가 연출한 무대다. 이런 의문은 2막 첫 ‘오필리어 장면’에서 더 강해졌다.

40대 중년의 잘나가는 여배우 아르까지나가 오빠 소린의 시골 영지에서 사람을 모아놓고 ‘햄릿’의 미친 오필리어 연기를 펼친다. 원작에는 나오지 않는 장면이다. 여기까지는 아르까지나의 캐릭터를 더 잘 보여주려는 의도로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르까지나는 영지 관리인 딸인 20대 마샤를 무대로 불러내고는 극중 관객에게 묻는다. “마샤가 젊어 보여요, 내가 젊어 보여요?” 답은 뻔하다. 아르까지나는 바쁘게 살아가는 배우로서의 활력 넘치는 삶과 아무런 의욕 없이 그냥 살아가는 마샤의 삶을 대조시키며 자신이 더 젊어보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원작과는 맥락이 다르다. 사적인 자리에서 마샤에게 진지하게 얘기한다. 무미건조한 삶에서 벗어나라는 개인적인 충고에 가깝다. 그의 따뜻한 면모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무대에선 마샤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면서 자신만 돋보이게 한다. 아르까지나가 줄곧 보여주는 매몰차고 이기적인 모습이다.

대폭 압축되고 변형된 대본은 각 인물의 전형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관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착한다. 마샤는 아르까지나의 아들 뜨레쁠로프를 보란듯이 쫓아다니고, 뜨레쁠로프는 “먀샤, 그만 좀 따라다녀”라고 신경질적으로 외친다. 원작에선 이렇게 직설적이지 않다. 뼈대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느라 살을 제거해 앙상해진 모양새다.

공연은 현대 사실주의 연극의 시초로 평가받는 작품을 사실적인 배경이나 세트는 일절 배제하고 극장의 무대 장치와 종이, 물, 거울, 영상 등을 활용한 상징적이고 현대적인 연출 기법으로 풀어간다. 2014년 알렉사가 연출한 ‘리처드 2세’를 본 관객이라면 대번에 ‘알렉사 스타일’을 눈치챌 법하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리처드 2세’에선 종이와 물이 은유적으로 쓰이며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열어놨지만 이번 무대에선 더 닫아놓는다. 4막 뜨레쁠로프와 그의 옛 연인 니나의 재회 장면. 배우의 꿈을 키우며 명성을 좇지만 결국 실패하고 3류 배우로 전락한 니나가 과거를 회상하며 “목이 마르다”고 하자 천장에서 폭우가 내리듯 물이 쏟아진다. 흠뻑 젖은 초라한 모습과 계속 떨어지는 물소리는 니나의 절망을 극대화한다. 절망을 인내로 견뎌내 어떻게든 삶을 계속 살아내겠다는 니나의 의지마저 삼켜버린다. 이 작품의 정수라 할 만한 대목을 초라하게 만든다.

여느 체호프 공연에선 볼 수 없는 강렬하고 격정적인 해석이지만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다. 정형화된 틀에 갇혀 뜨레쁠로프와 니나를 입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신인들의 연기가 갑갑함을 더한다. 29일까지, 2만~5만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