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간호
대장암 수술받고 70세 넘긴 후
오히려 짐될까 조용히 귀국
"환자가 가족에게 갈때 가장 행복"
소록도 어르신들의 생일이 되면 손수 구운 빵과 함께 생일을 축하했다. ‘당신의 탄생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의미였다. 결혼 후 소록도 밖 정착마을로 떠나는 한센인 부부의 손엔 정착금을 쥐어줬다. 세상과 등진 채 살아가는 한센인에게 스퇴거와 피사렛 수녀는 의사이자 수녀이자 엄마였다. 소록도 환자들은 그들을 ‘할매 천사’라고 불렀다.
2005년 두 사람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난 13일, 스퇴거 수녀가 11년 만에 소록도로 돌아왔다.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환자들은 할매 천사를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인터뷰하지 않았던 그를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만났다. 정갈한 회색 정장을 입은 스퇴거 수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안색은 밝았다.
“저희가 한 일 중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다 보니 43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입니다. 죽을 때도 소록도에 묻히고 싶었는데, 2003년 대장암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나니 제 나이 70세를 훌쩍 넘었습니다. 짐이 되겠구나 싶었죠. 일을 계속 하지 못하게 된다면 조용히 떠나야겠다고 생각해 떠났습니다. 광주에 나와서야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떠난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때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는 수녀님이라는 호칭보다 할매라고 불리길 원했다. 종교를 떠나 더 많은 환자가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환자들과 얘기할 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기도 하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된장찌개다. 모두가 환자들을 기피할 때 집으로 초대해 함께 밥을 먹곤 했다. “환자들에게 하나하나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저에겐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제일 친한 친구들이었죠.”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고 믿는 환자들에겐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도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고통을 짊어지셨어요. 한센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알게 된 사람은 그 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퇴거는 “친구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완치 후에도 가족들이 거부해 소록도에 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퇴거 수녀가 소록도에 남긴 건 사랑뿐만이 아니었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도움으로 소록도에 영아원과 결핵병동, 정신과 병동, 목욕탕 건물을 지었다.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은 한없이 청빈했다. 김연준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는 “40년간 보수를 단 한 푼도 받지 않으셨다”며 “돌아가신 분의 옷 중에서 멀쩡한 것을 골라 고쳐 입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사는 분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스퇴거는 “11년 만에 이 아름다운 섬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앓던 천식이 소록도에 오자마자 씻은 듯이 나았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에도 절친한 친구인 박성희 전 국립소록도병원 간호팀장과 한 시간씩 통화하며 소록도 소식을 들었을 정도로 그는 소록도를 잊지 못했다. 43년 소록도의 삶을 정리해달라고 말하자 두 손으로 큰 원을 그리고 이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이만큼, 하늘만큼 행복했어요.”
고흥=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