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2월, 두 명의 외국인 수녀가 ‘천형(天刑)의 섬’ 소록도에 찾아왔다. 오스트리아에서 파견된 마리안느 스퇴거(82·사진), 마가렛 피사렛(81) 수녀였다. 당시 한센인은 ‘하늘도 버린 존재’였다. 한국 의사와 간호사들조차 “직접 찔러보고 얼마나 아픈지 말해보라”며 환자들과의 접촉을 피하던 때였다. 두 사람은 달랐다. 환자들의 환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은 뒤 맨손으로 피고름을 짜고 진물을 닦아내며 상처를 치료했다.

소록도 어르신들의 생일이 되면 손수 구운 빵과 함께 생일을 축하했다. ‘당신의 탄생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의미였다. 결혼 후 소록도 밖 정착마을로 떠나는 한센인 부부의 손엔 정착금을 쥐어줬다. 세상과 등진 채 살아가는 한센인에게 스퇴거와 피사렛 수녀는 의사이자 수녀이자 엄마였다. 소록도 환자들은 그들을 ‘할매 천사’라고 불렀다.

2005년 두 사람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난 13일, 스퇴거 수녀가 11년 만에 소록도로 돌아왔다.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환자들은 할매 천사를 보자마자 “보고 싶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인터뷰하지 않았던 그를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만났다. 정갈한 회색 정장을 입은 스퇴거 수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안색은 밝았다.

스퇴거 수녀가 젊은 시절 소록도에서 한센인 가족을 돌보고 있는 모습.
스퇴거 수녀가 젊은 시절 소록도에서 한센인 가족을 돌보고 있는 모습.
“저희가 한 일 중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다 보니 43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입니다. 죽을 때도 소록도에 묻히고 싶었는데, 2003년 대장암 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나니 제 나이 70세를 훌쩍 넘었습니다. 짐이 되겠구나 싶었죠. 일을 계속 하지 못하게 된다면 조용히 떠나야겠다고 생각해 떠났습니다. 광주에 나와서야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떠난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때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는 수녀님이라는 호칭보다 할매라고 불리길 원했다. 종교를 떠나 더 많은 환자가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환자들과 얘기할 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기도 하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된장찌개다. 모두가 환자들을 기피할 때 집으로 초대해 함께 밥을 먹곤 했다. “환자들에게 하나하나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저에겐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제일 친한 친구들이었죠.”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고 믿는 환자들에겐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도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고통을 짊어지셨어요. 한센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알게 된 사람은 그 큰 힘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퇴거는 “친구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완치 후에도 가족들이 거부해 소록도에 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스퇴거 수녀가 소록도에 남긴 건 사랑뿐만이 아니었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도움으로 소록도에 영아원과 결핵병동, 정신과 병동, 목욕탕 건물을 지었다. 치료에 필요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은 한없이 청빈했다. 김연준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는 “40년간 보수를 단 한 푼도 받지 않으셨다”며 “돌아가신 분의 옷 중에서 멀쩡한 것을 골라 고쳐 입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사는 분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스퇴거는 “11년 만에 이 아름다운 섬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앓던 천식이 소록도에 오자마자 씻은 듯이 나았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에 갔을 때에도 절친한 친구인 박성희 전 국립소록도병원 간호팀장과 한 시간씩 통화하며 소록도 소식을 들었을 정도로 그는 소록도를 잊지 못했다. 43년 소록도의 삶을 정리해달라고 말하자 두 손으로 큰 원을 그리고 이렇게 말하며 활짝 웃었다. “이만큼, 하늘만큼 행복했어요.”

고흥=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