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다산 180주기
그날은 혼인 60주년이 되는 회혼일(回婚日)이었다. 180년 전인 1836년 4월7일(음력 2월22일). 18세기 최고 실학자이자 과학자·공학자·시인·저술가인 다산 정약용이 양평 마현리에서 영면했다. 강진 유배 18년을 비롯해 굴곡진 그의 생애가 남한강 물빛에 어른거렸다. 슬하의 6남3녀 중 4남2녀를 잃고,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피붙이를 잃고, 애끓는 배교(背敎)의 슬픔에도 굴하지 않던 조선 실학의 대가가 이 땅을 떠났다.

예순에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 묘지명까지 미리 써놓고 마지막 열정을 태우던 그였다. 자찬 묘지명에서 그는 ‘악당들이 기뻐 날뛰며 유언비어와 위태로운 말을 지어내 듣는 자들을 미혹시키는’ 세상을 안타까워하며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썼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주자학을 절대시하며 논쟁만 일삼는 현실에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으로 나라를 개혁하려다 숱한 모함과 누명을 써야 했다.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주자학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려는 그를 봉건세력은 가만두지 않았다. 노론을 비롯한 반대 세력이 그의 사후 130여년이 지날 때까지 숙적으로 삼을 정도였다.

그의 국가개혁 목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그는 오랜 세월 왜곡된 조선의 유학을 거부하고 원시유학의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신유학(新儒學)이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고증과 경세(經世), 목민(牧民)의 참뜻으로 재출발해야 나라와 백성이 윤택해진다는 것이었다.

‘경세유표’에서 통치·상업·국방의 중심 도시를 건설하고 토지를 개혁하며 세제, 군제, 신분제도까지 고치자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공업을 진흥하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그였다. 수원 화성 건축 때 거중기를 고안해 비용을 절반 이하로 줄이면서 이를 입증해 보였다.

그런 다산의 사상은 당대에 다 실현되진 못했지만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다산의 진면목을 모르고 거꾸로 ‘주자학의 벽’에 그를 가두는 이들이 있다. 원시유학으로 돌아가자고 한 뜻을 공자와 맹자를 맹신하자는 것으로 곡해한 탓이리라. 다산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단체까지 그러는 걸 보면 안쓰럽다. 어제 남양주 다산유적지에서 열린 180주기 행사도 선거를 앞둔 정치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걸 보니 더욱 그렇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