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인간이 이긴 것이다…이제 두뇌와 감성의 확장 시대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알파고 포비아? 인류의 뿌리 깊은 반기계문명 사고일 뿐
쟁기·방적기·자동차·컴퓨터처럼 알파고도 인간이 만든 것
인간의 한계 극복한 인류, 미증유의 신문명으로 들어간다
쟁기·방적기·자동차·컴퓨터처럼 알파고도 인간이 만든 것
인간의 한계 극복한 인류, 미증유의 신문명으로 들어간다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의 바둑 대결에서 연승하자 세계가 온통 ‘충격’ ‘경악’ ‘공포’에 휩싸였다. 개발한 지 2년밖에 안 된 인공지능이, 그것도 경우의 수가 전 우주의 원자수보다 많다는 바둑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충격은 클 것이다. 알파고는 그동안 프로기사들이 감(感)에 의존했던 기세, 두터움 등까지 계산해 냈고 불리하면 승부수를 던지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직관과 창의성에서도 인간을 추월하면 도대체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지 깊은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 때문에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같은 SF영화에서나 봤던 인공지능에 의한 지배가 현실화할 것이란 ‘인공지능포비아’도 커지고 있다.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이세돌의 빡빡한 대국일정에 따른 피로, 상대를 전혀 몰랐던 점 등에서 패배 요인을 찾는다. 그러나 이는 부수적 조건일 뿐이다. 아직 대국이 세 판 더 남았지만 지금까지 내용을 보면 알파고의 우세를 점치지 않을 수 없다. 승수와 상관없이 이미 시대는 바뀐 것이다. 인공지능이 언젠가는 개체로서의 인간 지능을 넘어설 것이라는 점은 너무도 당연한 전망이었는데 다만 그 순간이 ‘지금’으로 당겨진 것이다.
센세이션을 좇는 미디어들은 ‘인간이 기계에 졌다’며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충격을 부각시키는 데 혈안이다. 직업이 사라지고 인간이 기계에 종속될 것이란 종말론적 예언도 팽배해 있다. 대중은 우울증, 무기력증까지 호소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계문명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반감과 두려움이 깔려 있다. 바둑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계산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공지능의 초연산능력을 따라갈 방법은 없다. 알파고는 인간이라면 1000년이 걸릴 3000만 가지 프로기사들의 기보를 불과 몇 달 만에 학습한다. 앞으로는 학습시간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단순 모방을 넘어 스스로 수를 창조할 능력까지 갖췄다. 어쩌면 결과는 예정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새 기계’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산업이 펼쳐질 때마다 인류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껴 왔다.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처음으로 기구를 썼던 때부터 그런 공포감은 길러졌을 것이다. 쟁기로 땅을 개간하는 것조차 ‘어머니 자연’을 헤집는 행위로 간주했고 이는 천신, 지신에 대한 다양한 제례행위를 어느 민족에서나 발견할 수 있게 했다. 철학에서도 ‘반기계 반문명’은 일상적이다. 동양의 장자는 두레를 써서 우물의 물을 긷는 것에 비유해 기계의 효율에 의존하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어 도가 깃들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탈레스 등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여겼고 이런 사고 패턴은 근대 산업혁명기에 방적기를 부순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 현대의 유나바머 운동, 히피나 환경 근본주의자들과도 맥이 닿아 있다.
하지만 기계를 기피하고 자연을 찬미한다고 문명을 막을 순 없다. 문명은 인류가 스스로의 능력을 확장하고 도약시켜온 기나긴 여정이다. 쟁기를 통해 농업혁명을 이뤘고 증기기관, 자동차, 비행기를 발명해 뛰고 달리고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도록 만들어 왔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두뇌의 한계와 감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 접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IoT(사물인터넷) 시대는 인간의 감성을 기계와 연결하는 거대한 산업으로 이미 출발하고 있다. 이제 인간의 지성까지도 스스로 학습하면서 인간활동을 또 한 단계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겉으로는 인간 대 기계의 대결의 양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알파고는 외계인의 창조물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고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기계에 졌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이 이긴 것이다. 이는 인류 두뇌의 확장이자 지성의 도약이다. 미증유의 고도화된 신문명이 펼쳐지고 있다. 새로운 문명은 늘 적응과 격차의 문제를 낳는다. 사라지는 직업도 있겠지만 더 많은 직업이 생겨날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할 변혁이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여명기다. 한국인이 뒤처져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이세돌의 빡빡한 대국일정에 따른 피로, 상대를 전혀 몰랐던 점 등에서 패배 요인을 찾는다. 그러나 이는 부수적 조건일 뿐이다. 아직 대국이 세 판 더 남았지만 지금까지 내용을 보면 알파고의 우세를 점치지 않을 수 없다. 승수와 상관없이 이미 시대는 바뀐 것이다. 인공지능이 언젠가는 개체로서의 인간 지능을 넘어설 것이라는 점은 너무도 당연한 전망이었는데 다만 그 순간이 ‘지금’으로 당겨진 것이다.
센세이션을 좇는 미디어들은 ‘인간이 기계에 졌다’며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충격을 부각시키는 데 혈안이다. 직업이 사라지고 인간이 기계에 종속될 것이란 종말론적 예언도 팽배해 있다. 대중은 우울증, 무기력증까지 호소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기계문명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반감과 두려움이 깔려 있다. 바둑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계산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공지능의 초연산능력을 따라갈 방법은 없다. 알파고는 인간이라면 1000년이 걸릴 3000만 가지 프로기사들의 기보를 불과 몇 달 만에 학습한다. 앞으로는 학습시간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단순 모방을 넘어 스스로 수를 창조할 능력까지 갖췄다. 어쩌면 결과는 예정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새 기계’가 나올 때마다, 새로운 산업이 펼쳐질 때마다 인류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껴 왔다.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처음으로 기구를 썼던 때부터 그런 공포감은 길러졌을 것이다. 쟁기로 땅을 개간하는 것조차 ‘어머니 자연’을 헤집는 행위로 간주했고 이는 천신, 지신에 대한 다양한 제례행위를 어느 민족에서나 발견할 수 있게 했다. 철학에서도 ‘반기계 반문명’은 일상적이다. 동양의 장자는 두레를 써서 우물의 물을 긷는 것에 비유해 기계의 효율에 의존하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어 도가 깃들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탈레스 등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여겼고 이런 사고 패턴은 근대 산업혁명기에 방적기를 부순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 현대의 유나바머 운동, 히피나 환경 근본주의자들과도 맥이 닿아 있다.
하지만 기계를 기피하고 자연을 찬미한다고 문명을 막을 순 없다. 문명은 인류가 스스로의 능력을 확장하고 도약시켜온 기나긴 여정이다. 쟁기를 통해 농업혁명을 이뤘고 증기기관, 자동차, 비행기를 발명해 뛰고 달리고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복무하도록 만들어 왔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두뇌의 한계와 감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 접어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IoT(사물인터넷) 시대는 인간의 감성을 기계와 연결하는 거대한 산업으로 이미 출발하고 있다. 이제 인간의 지성까지도 스스로 학습하면서 인간활동을 또 한 단계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겉으로는 인간 대 기계의 대결의 양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알파고는 외계인의 창조물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고 발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기계에 졌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이 이긴 것이다. 이는 인류 두뇌의 확장이자 지성의 도약이다. 미증유의 고도화된 신문명이 펼쳐지고 있다. 새로운 문명은 늘 적응과 격차의 문제를 낳는다. 사라지는 직업도 있겠지만 더 많은 직업이 생겨날 것이다.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할 변혁이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문명의 여명기다. 한국인이 뒤처져 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