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최고령 현역 보디빌더' 서영갑 "근육은 몸 속의 행복발전소…3㎏ 아령이 제 인생을 바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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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님 출신 '최고령 현역 보디빌더' 81세 서영갑 씨
40년 든 '가보 1호'아령
40대부터 허리·무릎 등에 통증…아령운동 시작 후 씻은 듯 사라져
64세에 도전한 보디빌더의 길…60세때 '미스터 대구' 보고 충격
퇴직 후 "나도 출전하고 싶다"…두 달여 맹연습 후 중년부 1등
"근육에는 나이가 없다"
방송·특강 통해 운동법 등 소개…'근육운동 전도사'로 맹활약
40년 든 '가보 1호'아령
40대부터 허리·무릎 등에 통증…아령운동 시작 후 씻은 듯 사라져
64세에 도전한 보디빌더의 길…60세때 '미스터 대구' 보고 충격
퇴직 후 "나도 출전하고 싶다"…두 달여 맹연습 후 중년부 1등
"근육에는 나이가 없다"
방송·특강 통해 운동법 등 소개…'근육운동 전도사'로 맹활약
‘이 시대의 영원한 근육맨’ ‘81세 차인표’ ‘현역 최고령 보디빌더’ 서영갑 씨(81·사진). 중학교 교장 출신이다. 취재를 위해 화요일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바로 인터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통 바쁜 사람이 아니었다.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 출연과 강의 등으로 일요일 오후에야 시간이 잡혔다.
대구 만촌동 자택을 찾았다. 삭발을 해서인지 영화배우 율 브린너, 젊은 날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생각났다. 첫인상이 강인하면서도 인자하게 보였다.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 하나, 그리고 외투만 걸쳤다.
거실에 들어서자 차와 함께 “이게 제 이력입니다” 하고 친절하게 약력(略歷)을 줬다. ‘3W 운동법 지도강사’ ‘현역 전국 최고령 보디빌딩 선수’라고 소개한 약력에는 경북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았으며 국민훈장 동백장, 대구보디빌더 최고 체육상을 3회 받았다는 사실 등 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교장선생님 출신 최고령 보디빌더’는 ‘거짓말 같은 기적’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았다.
교장선생님, 보디빌더 되다
서씨는 대구 경북고 경북여고 등에서 40여년간 영어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대구 덕화여중 교장을 끝으로 1999년 8월 퇴직했다. 퇴직 후 64세에 처음 출전한 보디빌딩 대회에서 1등을 거머쥐었다. 이후 90여개 대회에 나갔다. 65세 이상에서는 맞설 사람이 없다. 지난해 10월 열린 문화체육장관기 보디빌더 대회에서는 팔순의 나이로 우승했다. 이젠 대회를 주관하는 보디빌더협회에서는 서씨의 출전을 학수고대한다. 나올 때마다 신기록이기도 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많은 후배에게 큰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요즘은 현역 보디빌더보다 ‘장수 시대 근육운동의 중요성’을 전하는 일로 더 바쁘다. ‘영어’에서 ‘건강’으로 과목이 바뀌었을 뿐 천직인 ‘가르침’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가르침이 더 중요한 ‘인생’인지도 모른다. 100세 시대가 축복보다는 재앙으로 다가온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노년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서씨가 보디빌더가 되려고 마음 먹은 것은 퇴직을 4년 앞둔 1995년, 60세 때였다. 길을 가다 우연히 미스터 대구 선발대회 포스터를 보고 대구시민회관에서 열린 경기를 바로 관람하러 갔다. “일부러 제일 앞자리에 앉았죠. 화려한 조명을 받은 젊은이들의 몸매에서 살아 숨쉬는 근육 무리,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죠. 황홀하더라고요. 퇴직 후 반드시 저 무대에 서리라 다짐했죠.” 예술작품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스탕달 신드롬’ 같은 경험이었다. 당시 아내에게 “점잖은 교장선생님이 팬티 바람에, 노망했능교”란 핀잔을 들어야 했다. 서씨는 “병치레하며 집에만 박혀 ‘삼식이’ 되면 우짤래”라고 아내를 설득했다.
더 근본적인 계기는 40대 중반부터 나타난 건강 이상 신호였다. “40대 중반에 신체의 퇴행이 찾아왔습니다. 영어가 주요 과목이어서 수업 시간이 많은 데다 고3 담임을 맡다 보니 ‘별 보고 출근해 별 보고 돌아오는 일과’가 반복됐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동료 교사들과 대포도 한 잔씩 걸쳤죠.”
무릎도 시원찮고 허리도 아팠다. “이 나이에 큰일 났다”고 고민하던 서씨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것은 신문기사였다.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 씨가 아령으로 건강을 찾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변 전 장관은 출장 때도 아령을 갖고 다닌다고 했다. 파트너 없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아령. 보디빌더 인생은 그날 그렇게 시작됐다.
인생을 바꾼 3㎏짜리 아령
서씨에게 40년 전 산 3㎏짜리 아령은 ‘가보 1호’다. 투박하게 생긴 무쇠 아령이다. 오래 쥐고 있으면 녹물이 묻어나와 손잡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실이 감겨 있었다. 집에서 틈만 나면 아령을 들고 운동을 했다. 2년 가까이 지속하자 이두박근 삼두박근 대흉근 등 서서히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아픈 허리와 무릎도 다 나았다. 서씨가 미스터 대회 포스터에 눈길이 간 것도, 보디빌더의 인생을 사는 것도 모두 이 조그만 아령에서 비롯됐다.
1999년 64세 때 교단에서 내려온 서씨는 퇴직 나흘 만인 그해 9월4일 헬스클럽을 찾았다. “미스터 대회에 나가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물었다. 옷을 벗어보라고 했다. “운동 좀 하셨네요, 교장선생님.”
서씨는 복근운동을 열심히 하며 규정 종목인 7가지 포즈를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40대부터 몸을 만들어온 덕이었을까. 두 달 후 열린 50세 이상 중년부에서 1등을 했다. 20년 만에 꿈을 이룬 것이다.
서씨는 건강해지고 나서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40대 당시 키가 165㎝에 몸무게는 60㎏ 정도에 불과했죠. 왜소한 체격이어서 그런지 자꾸 뒤로 숨고, 어디든 나서질 않았어요.”
하지만 꾸준히 몸을 가꿔 나가면서 2002년 월드컵, 2011년 대구육상선수권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영어 자원봉사를 했다. 2005년부터 곽병원 부설 건강대학에서 매년 ‘아령을 이용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주제로 특강을 한다. 15개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모임 뒤풀이에선 건강을 무기로 가장 ‘자유롭게’ 술을 즐긴다.
“좀 불편하게 살아야 건강하다”
서씨는 “건강하게 살려면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5년째 모래주머니를 차고 외출한다. 근육에 무게를 싣기 위해서다. “모래주머니를 차지 않으면 바람에 날리는 것 같아요. 안정감이 없죠.”
지하철에 자리가 있어도 잘 앉지 않는다.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들에게 정중하게 사양한다. 서씨에게 전화하면 “‘근육엔 나이가 없다’, 근육운동 전도사 서영갑입니다”란 멘트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온다.
그는 “근육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무기이자 행복 발전소”라고 말했다. “지팡이 안 짚고 유모차 안 밀고 다니려면 아령 들고 근력운동하라”고 말한다. 그런 뜻에서 ‘3W 운동법’을 개발했다. 의지(will)와 걷기(walk), 무게(weight)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뭐든지 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걷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과 근육운동을 꾸준히 한다는 의미다.
퇴직 교육공무원 모임인 ‘진우회’ 친구들에겐 아령을 사주면서까지 운동을 권했다. “아령을 사줄 때 시작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는 친구들에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용기를 줬다. “이 나이에 어떻게” 하고 자조하는 사람들에겐 “내가 산증인 아니냐”고 설득한다. “당당한 삶을 살려면 40대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유산소 운동만 하는 건 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30대에 근육이 최고로 발달하고 40대부터 근육량이 서서히 빠집니다. 근육운동은 반드시 열을 발생시켜 혈액순환이 잘 되게 하고, 대사를 촉진시킵니다. 대사가 원활해야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죠. 90대도 근육운동은 필요하고 효과가 있습니다.”
운동 방법, 삶의 자세를 설명하는 서씨의 말과 행동은 마치 물 흐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꼭 무거운 걸 들 필요는 없어요. 오전이든 오후든 몸이 받아들일 때 아무 때나 해도 됩니다. 대회 출전, 이제 등수는 상관 안해요.”
“헬스클럽을 차리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서씨는 “돈보다 즐겁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에게 보디빌더는 직업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도록 돕는 목표일 뿐이다. “오래 사는 것이 목표는 아니지만 사는 동안엔 건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지난해 팔순잔치 때 자신의 운동 경험 방법, 인생 이야기를 담은 《근육은 나이가 없다》라는 책을 냈다. 신문 및 TV 인터뷰에 흔쾌히 응하는 것도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근육운동의 중요성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서씨는 40년간의 교직생활 시절보다 더욱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리 몸은 정말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근력운동하면 몸이 반응합니다. 웬만하면 걸어가고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죠. 지금 시작하세요.”
■ 보디빌더의 세계
트레이닝에 식단 관리까지 전문가 지도 2년은 받아야
‘우람’보다 ‘슬림 근육’ 인기
‘몸짱’ 열풍에 더해 요즘 ‘머슬보이’ ‘머슬퀸’이 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보디빌더와 근육운동이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헬스장도 증가하고 있다. 남자 보디빌딩은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1970년 국제보디빌딩연맹 국제회의에서 현대 스포츠 분야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김동우 대구보디빌딩협회 전무는 “보디빌더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근육에 자극을 줘야 하는데 혼자선 편하게 운동하려 해 올바른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겨울에는 몸을 불리고, 봄부터는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15~18%인 체지방률을 7%까지 줄여야 한다. 최소 2년간 트레이닝과 식단관리를 통해 전문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보디빌더의 적령기는 35세에서 40세다.
아마추어로서 어느 정도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6개월 이상 지도를 받아야 한다. 프로 트레이너들은 헬스센터에서 코치로 일정액을 받고 개인지도(PT·퍼스널 트레이닝)를 통해 추가 수입을 얻는다. PT 수업료는 월 10회 기준으로 평균 50만원 선이며, 유명한 트레이너에게 코치를 받으려면 월 80만~150만원 선까지 올라간다.
요즘은 우람한 근육보다는 날렵한 몸매에 슬림한 근육이 인기다. 김 전무는 “‘외모=스펙’이란 등식이 성립하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헬스장을 찾는다”며 “건강을 위한 웨이트 트레이닝은 면역력을 강화하므로 적극 추천한다”고 말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
대구 만촌동 자택을 찾았다. 삭발을 해서인지 영화배우 율 브린너, 젊은 날의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생각났다. 첫인상이 강인하면서도 인자하게 보였다.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 하나, 그리고 외투만 걸쳤다.
거실에 들어서자 차와 함께 “이게 제 이력입니다” 하고 친절하게 약력(略歷)을 줬다. ‘3W 운동법 지도강사’ ‘현역 전국 최고령 보디빌딩 선수’라고 소개한 약력에는 경북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았으며 국민훈장 동백장, 대구보디빌더 최고 체육상을 3회 받았다는 사실 등 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교장선생님 출신 최고령 보디빌더’는 ‘거짓말 같은 기적’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았다.
교장선생님, 보디빌더 되다
서씨는 대구 경북고 경북여고 등에서 40여년간 영어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대구 덕화여중 교장을 끝으로 1999년 8월 퇴직했다. 퇴직 후 64세에 처음 출전한 보디빌딩 대회에서 1등을 거머쥐었다. 이후 90여개 대회에 나갔다. 65세 이상에서는 맞설 사람이 없다. 지난해 10월 열린 문화체육장관기 보디빌더 대회에서는 팔순의 나이로 우승했다. 이젠 대회를 주관하는 보디빌더협회에서는 서씨의 출전을 학수고대한다. 나올 때마다 신기록이기도 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많은 후배에게 큰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요즘은 현역 보디빌더보다 ‘장수 시대 근육운동의 중요성’을 전하는 일로 더 바쁘다. ‘영어’에서 ‘건강’으로 과목이 바뀌었을 뿐 천직인 ‘가르침’의 삶은 바뀌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의 가르침이 더 중요한 ‘인생’인지도 모른다. 100세 시대가 축복보다는 재앙으로 다가온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노년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서씨가 보디빌더가 되려고 마음 먹은 것은 퇴직을 4년 앞둔 1995년, 60세 때였다. 길을 가다 우연히 미스터 대구 선발대회 포스터를 보고 대구시민회관에서 열린 경기를 바로 관람하러 갔다. “일부러 제일 앞자리에 앉았죠. 화려한 조명을 받은 젊은이들의 몸매에서 살아 숨쉬는 근육 무리,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죠. 황홀하더라고요. 퇴직 후 반드시 저 무대에 서리라 다짐했죠.” 예술작품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스탕달 신드롬’ 같은 경험이었다. 당시 아내에게 “점잖은 교장선생님이 팬티 바람에, 노망했능교”란 핀잔을 들어야 했다. 서씨는 “병치레하며 집에만 박혀 ‘삼식이’ 되면 우짤래”라고 아내를 설득했다.
더 근본적인 계기는 40대 중반부터 나타난 건강 이상 신호였다. “40대 중반에 신체의 퇴행이 찾아왔습니다. 영어가 주요 과목이어서 수업 시간이 많은 데다 고3 담임을 맡다 보니 ‘별 보고 출근해 별 보고 돌아오는 일과’가 반복됐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동료 교사들과 대포도 한 잔씩 걸쳤죠.”
무릎도 시원찮고 허리도 아팠다. “이 나이에 큰일 났다”고 고민하던 서씨에게 운명처럼 찾아온 것은 신문기사였다.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 씨가 아령으로 건강을 찾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변 전 장관은 출장 때도 아령을 갖고 다닌다고 했다. 파트너 없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아령. 보디빌더 인생은 그날 그렇게 시작됐다.
인생을 바꾼 3㎏짜리 아령
서씨에게 40년 전 산 3㎏짜리 아령은 ‘가보 1호’다. 투박하게 생긴 무쇠 아령이다. 오래 쥐고 있으면 녹물이 묻어나와 손잡이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실이 감겨 있었다. 집에서 틈만 나면 아령을 들고 운동을 했다. 2년 가까이 지속하자 이두박근 삼두박근 대흉근 등 서서히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아픈 허리와 무릎도 다 나았다. 서씨가 미스터 대회 포스터에 눈길이 간 것도, 보디빌더의 인생을 사는 것도 모두 이 조그만 아령에서 비롯됐다.
1999년 64세 때 교단에서 내려온 서씨는 퇴직 나흘 만인 그해 9월4일 헬스클럽을 찾았다. “미스터 대회에 나가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물었다. 옷을 벗어보라고 했다. “운동 좀 하셨네요, 교장선생님.”
서씨는 복근운동을 열심히 하며 규정 종목인 7가지 포즈를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40대부터 몸을 만들어온 덕이었을까. 두 달 후 열린 50세 이상 중년부에서 1등을 했다. 20년 만에 꿈을 이룬 것이다.
서씨는 건강해지고 나서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40대 당시 키가 165㎝에 몸무게는 60㎏ 정도에 불과했죠. 왜소한 체격이어서 그런지 자꾸 뒤로 숨고, 어디든 나서질 않았어요.”
하지만 꾸준히 몸을 가꿔 나가면서 2002년 월드컵, 2011년 대구육상선수권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영어 자원봉사를 했다. 2005년부터 곽병원 부설 건강대학에서 매년 ‘아령을 이용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주제로 특강을 한다. 15개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모임 뒤풀이에선 건강을 무기로 가장 ‘자유롭게’ 술을 즐긴다.
“좀 불편하게 살아야 건강하다”
서씨는 “건강하게 살려면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5년째 모래주머니를 차고 외출한다. 근육에 무게를 싣기 위해서다. “모래주머니를 차지 않으면 바람에 날리는 것 같아요. 안정감이 없죠.”
지하철에 자리가 있어도 잘 앉지 않는다.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들에게 정중하게 사양한다. 서씨에게 전화하면 “‘근육엔 나이가 없다’, 근육운동 전도사 서영갑입니다”란 멘트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온다.
그는 “근육은 우리 몸을 보호하는 무기이자 행복 발전소”라고 말했다. “지팡이 안 짚고 유모차 안 밀고 다니려면 아령 들고 근력운동하라”고 말한다. 그런 뜻에서 ‘3W 운동법’을 개발했다. 의지(will)와 걷기(walk), 무게(weight)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뭐든지 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걷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과 근육운동을 꾸준히 한다는 의미다.
퇴직 교육공무원 모임인 ‘진우회’ 친구들에겐 아령을 사주면서까지 운동을 권했다. “아령을 사줄 때 시작했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는 친구들에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용기를 줬다. “이 나이에 어떻게” 하고 자조하는 사람들에겐 “내가 산증인 아니냐”고 설득한다. “당당한 삶을 살려면 40대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유산소 운동만 하는 건 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30대에 근육이 최고로 발달하고 40대부터 근육량이 서서히 빠집니다. 근육운동은 반드시 열을 발생시켜 혈액순환이 잘 되게 하고, 대사를 촉진시킵니다. 대사가 원활해야 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죠. 90대도 근육운동은 필요하고 효과가 있습니다.”
운동 방법, 삶의 자세를 설명하는 서씨의 말과 행동은 마치 물 흐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꼭 무거운 걸 들 필요는 없어요. 오전이든 오후든 몸이 받아들일 때 아무 때나 해도 됩니다. 대회 출전, 이제 등수는 상관 안해요.”
“헬스클럽을 차리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서씨는 “돈보다 즐겁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에게 보디빌더는 직업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도록 돕는 목표일 뿐이다. “오래 사는 것이 목표는 아니지만 사는 동안엔 건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지난해 팔순잔치 때 자신의 운동 경험 방법, 인생 이야기를 담은 《근육은 나이가 없다》라는 책을 냈다. 신문 및 TV 인터뷰에 흔쾌히 응하는 것도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근육운동의 중요성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서씨는 40년간의 교직생활 시절보다 더욱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리 몸은 정말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근력운동하면 몸이 반응합니다. 웬만하면 걸어가고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 몸은 내가 지켜야죠. 지금 시작하세요.”
■ 보디빌더의 세계
트레이닝에 식단 관리까지 전문가 지도 2년은 받아야
‘우람’보다 ‘슬림 근육’ 인기
‘몸짱’ 열풍에 더해 요즘 ‘머슬보이’ ‘머슬퀸’이 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보디빌더와 근육운동이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헬스장도 증가하고 있다. 남자 보디빌딩은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1970년 국제보디빌딩연맹 국제회의에서 현대 스포츠 분야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김동우 대구보디빌딩협회 전무는 “보디빌더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근육에 자극을 줘야 하는데 혼자선 편하게 운동하려 해 올바른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겨울에는 몸을 불리고, 봄부터는 다이어트를 시작한다. 몸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력과 노력이 필요하다. 보통 15~18%인 체지방률을 7%까지 줄여야 한다. 최소 2년간 트레이닝과 식단관리를 통해 전문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 보디빌더의 적령기는 35세에서 40세다.
아마추어로서 어느 정도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6개월 이상 지도를 받아야 한다. 프로 트레이너들은 헬스센터에서 코치로 일정액을 받고 개인지도(PT·퍼스널 트레이닝)를 통해 추가 수입을 얻는다. PT 수업료는 월 10회 기준으로 평균 50만원 선이며, 유명한 트레이너에게 코치를 받으려면 월 80만~150만원 선까지 올라간다.
요즘은 우람한 근육보다는 날렵한 몸매에 슬림한 근육이 인기다. 김 전무는 “‘외모=스펙’이란 등식이 성립하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헬스장을 찾는다”며 “건강을 위한 웨이트 트레이닝은 면역력을 강화하므로 적극 추천한다”고 말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