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조심스런 낙관, 디턴의 '성장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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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턴은 불평등이 사회악으로 여겨지는 지적 풍토에서
불평등의 긍정적인 면을 체계적으로 언급했다"
조동근 < 명지대 경제학 교수·바른사회 공동대표 dkcho@mju.ac.kr >
불평등의 긍정적인 면을 체계적으로 언급했다"
조동근 < 명지대 경제학 교수·바른사회 공동대표 dkcho@mju.ac.kr >
2015년 노벨경제학상은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그의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한 소비와 빈곤, 복지에 대한 연구 업적이 인정받은 것이다. 그는 위대한 탈출의 저자이기도 하다.
디턴은 조심스런 ‘성찰적 낙관주의자’다. 그는 불평등이 사회악으로 여겨지는 지적 풍토에서 불평등의 ‘긍정적인 면’을 체계적으로 언급했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불평등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길을 보여주고 ‘따라잡기’의 유인을 제공한다. 성공이 만들어낸 격차는 생산적일 수 있다. 따라잡기를 유발하며 이득을 소수에서 많은 사람에게로 퍼뜨리는 기회와 유인 모두를 창출한다. 임금에서의 숙련 프리미엄은 더 많은 사람에게 교육을 받도록 동기를 부여했고 교육을 받은 노동자 공급이 늘면서 기술 진보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턴은 불평등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승자들이 다른 이들의 따라잡기를 가로막고, 그들 뒤의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면 불평등은 나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탈출’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해치고 성장을 가로막아 탈출의 행렬을 가로막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턴이 위대한 탈출로 노벨상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면서 이 책의 ‘번역과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각에서 지적했듯이 출판사가 번역 과정에서 ‘통상적 재량 범위’를 넘어선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하지만 귀책사유는 거기까지다. 일부 번역을 빌미로 ‘왜곡과 지적 사기’를 들먹이는 것은 견강부회다.
책의 해석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는 비판의 요지는 “불평등을 미화했으며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디턴과 피케티를 의도적으로 대척점에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현상의 본질은 다면적이어서 강조하는 바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불평등의 양면성을 지적한 디턴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놓고, ‘무지, 오해, 왜곡’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닫힌 사고를 반영할 뿐이다. 또 디턴이 피케티의 저술을 높이 평가한 것은 맞지만, 이 같은 사실이 “디턴이 피케티의 사고와 철학에 동의했고 그래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디턴과 피케티는 불평등의 요인 분석과 해법 제시가 전혀 다르다. 따라서 디턴과 피케티를 ‘작위적’으로 대척점에 위치시켰다는 주장은 설득적이지 않다.
한 가지 짚을 것이 있다. 최상위 1%의 소득점유율이 1970년대 중반 이후 크게 높아졌지만 ‘그 다음 9%’ 즉 상위 90~99%의 소득점유율은 150년간 큰 차이가 없었다. 이는 소득 집중이 자본 축적의 동학, 즉 ‘자본/소득’ 비율의 확대로 추동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피케티식의 거대 담론보다 국가별 특수 상황이나 문화·제도적 요인으로 불평등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턴은 세계화와 새로운 직업군의 등장, 그들이 소득을 버는 방식의 변화 등으로 ‘상위 1% 소득계층’의 부상을 설명했다. 그는 고액 연봉과 높은 성과급, 스톡옵션으로 소득을 얻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월스트리트 은행가, 펀드매니저, 연예인 등의 고소득층에 주목했다. 하지만 금융 등 ‘규제산업’의 높은 보수에 대해서는 비판의 각을 세웠다. 설계자에게 고소득을 안겨준 첨단 금융상품을 ‘재무적 대량살상무기’라고 한 버핏에 동의한다.
디턴의 불평등 해법은 ‘나쁜 불평등’, 즉 제도적 요인에 의한 ‘불공정’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규칙을 부자들이 쓰고 부자들이 그 규칙으로 더 부자가 되는 ‘금권정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투명한 시장규율 확립과 경쟁 촉진’으로 압축된다. 그런 점에서 ‘부의 세습’에 함몰돼 최고 소득계층에 대한 징벌적 중과세를 주장한 피케티와는 다르다.
불평등을 악(惡)으로 여기는 것은 쉽다. 하지만 불평등이 ‘성장의 사다리’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은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최적의 불평등 정도가 완전 평등은 아니다. 성공 사다리는 오르려는 의지가 있는 자만이 오르게 돼 있다.
조동근 < 명지대 경제학 교수·바른사회 공동대표 dkcho@mju.ac.kr >
디턴은 조심스런 ‘성찰적 낙관주의자’다. 그는 불평등이 사회악으로 여겨지는 지적 풍토에서 불평등의 ‘긍정적인 면’을 체계적으로 언급했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불평등은 사람들에게 성공의 길을 보여주고 ‘따라잡기’의 유인을 제공한다. 성공이 만들어낸 격차는 생산적일 수 있다. 따라잡기를 유발하며 이득을 소수에서 많은 사람에게로 퍼뜨리는 기회와 유인 모두를 창출한다. 임금에서의 숙련 프리미엄은 더 많은 사람에게 교육을 받도록 동기를 부여했고 교육을 받은 노동자 공급이 늘면서 기술 진보 속도가 빨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턴은 불평등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승자들이 다른 이들의 따라잡기를 가로막고, 그들 뒤의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면 불평등은 나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탈출’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해치고 성장을 가로막아 탈출의 행렬을 가로막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턴이 위대한 탈출로 노벨상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면서 이 책의 ‘번역과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각에서 지적했듯이 출판사가 번역 과정에서 ‘통상적 재량 범위’를 넘어선 것은 분명 잘못이다. 하지만 귀책사유는 거기까지다. 일부 번역을 빌미로 ‘왜곡과 지적 사기’를 들먹이는 것은 견강부회다.
책의 해석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는 비판의 요지는 “불평등을 미화했으며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디턴과 피케티를 의도적으로 대척점에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현상의 본질은 다면적이어서 강조하는 바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불평등의 양면성을 지적한 디턴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놓고, ‘무지, 오해, 왜곡’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닫힌 사고를 반영할 뿐이다. 또 디턴이 피케티의 저술을 높이 평가한 것은 맞지만, 이 같은 사실이 “디턴이 피케티의 사고와 철학에 동의했고 그래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디턴과 피케티는 불평등의 요인 분석과 해법 제시가 전혀 다르다. 따라서 디턴과 피케티를 ‘작위적’으로 대척점에 위치시켰다는 주장은 설득적이지 않다.
한 가지 짚을 것이 있다. 최상위 1%의 소득점유율이 1970년대 중반 이후 크게 높아졌지만 ‘그 다음 9%’ 즉 상위 90~99%의 소득점유율은 150년간 큰 차이가 없었다. 이는 소득 집중이 자본 축적의 동학, 즉 ‘자본/소득’ 비율의 확대로 추동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피케티식의 거대 담론보다 국가별 특수 상황이나 문화·제도적 요인으로 불평등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디턴은 세계화와 새로운 직업군의 등장, 그들이 소득을 버는 방식의 변화 등으로 ‘상위 1% 소득계층’의 부상을 설명했다. 그는 고액 연봉과 높은 성과급, 스톡옵션으로 소득을 얻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월스트리트 은행가, 펀드매니저, 연예인 등의 고소득층에 주목했다. 하지만 금융 등 ‘규제산업’의 높은 보수에 대해서는 비판의 각을 세웠다. 설계자에게 고소득을 안겨준 첨단 금융상품을 ‘재무적 대량살상무기’라고 한 버핏에 동의한다.
디턴의 불평등 해법은 ‘나쁜 불평등’, 즉 제도적 요인에 의한 ‘불공정’을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규칙을 부자들이 쓰고 부자들이 그 규칙으로 더 부자가 되는 ‘금권정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투명한 시장규율 확립과 경쟁 촉진’으로 압축된다. 그런 점에서 ‘부의 세습’에 함몰돼 최고 소득계층에 대한 징벌적 중과세를 주장한 피케티와는 다르다.
불평등을 악(惡)으로 여기는 것은 쉽다. 하지만 불평등이 ‘성장의 사다리’가 될 수 있음을 간파한 것은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최적의 불평등 정도가 완전 평등은 아니다. 성공 사다리는 오르려는 의지가 있는 자만이 오르게 돼 있다.
조동근 < 명지대 경제학 교수·바른사회 공동대표 dkcho@mj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