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Biz] "어머님, 담임교사예요~"…16억 뜯은 '간 큰 학부모'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윤성이 어머님이시죠? 담임교사 이행자입니다.” 소파에 앉아있던 나는 무의식중에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이 담임의 전화였다. 윤성이는 서울 북서부의 한 사립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담임교사와 통화하기는 처음이었다. 담임은 아이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다 조심스러운 제안을 했다. “학교에서 바자를 하는데 돈이 좀 모자라네요. 학교발전기금을 내주셨으면 해요.” 아이 학교를 위한 일인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담임교사가 알려준 학부모 회장의 계좌로 여섯 번에 걸쳐 800만원을 송금했다. 2012년 3월 말의 일이다.

담임의 전화는 이듬해 5월에도 걸려왔다. “어머님, 교육청 감사가 들어와 작년 학교발전기금을 낸 게 문제가 됐어요. 감사를 무마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나는 3100만원을 마련해 담임이 알려준 학부모 회장 아들 명의의 계좌로 부쳤다.

전화는 계속 이어졌다. “교육청에 뇌물 준 게 발각됐습니다. 사건이 검찰로 송치됐는데 뇌물죄 말고 가벼운 죄명으로 기소되려면 검찰에 돈을 줘야 해요.”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 나까지 불려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급한 대로 이곳저곳에서 돈을 마련했다.

두 달 뒤인 2013년 8월, 이번엔 학교 학부모 회장인 설모씨(39)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와는 언니 동생 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서부지방검찰청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윤성 엄마, 교육청 감사 뇌물수수 사건에 내 계좌가 이용된 건 알고 있죠. 그거 때문에 지금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야 돼요.” 1시간쯤 지났을까. 검찰청사 안에서 학부모 회장이 걸어 나왔다. 지친 모습이었다. “검사가 2억6000만원 보석금을 내든지 징역 1년6개월을 살든지 하나를 선택하래. 그러게 왜 교육청에 돈을 건넸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보석금 2억6000만원을 비롯해 다섯 차례에 걸쳐 총 7억8000여만원을 송금했다. 그 후로도 1억1250만원을 더 건넸다.

이 정도 했으면 사건이 매듭지어진 줄 알았다. 2014년 9월, 담임교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사건이 재판에 넘어갔어요. 사건을 끝내려면 보석금 등으로 4억4000만원이 든다네요.” 한 빵집에서 담임 대신 나온 설씨를 만나 현금다발을 전했다.

어느 날 나는 온몸에서 식은땀이 쭉 흘렀다. 학교를 찾아가 담임에게 사건 진행 상황을 물었더니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담임교사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지난 2년여간 난 누구와 통화를 한 걸까. 16억원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난 경찰서로 향했다. 조사 결과 내가 건넨 돈은 학부모 회장인 설씨가 다른 피해자에 대한 합의금, 해외여행 비용 등으로 썼다고 했다. 설씨가 목소리까지 변조해 나를 속인 것이다. 바자, 교육청 감사, 검찰 수사, 법원의 재판 등 모든 게 설씨가 짠 각본이었다.

○법원의 판단은

서울고등법원 형사8부(부장판사 이광만)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설씨에게 지난 16일 1심과 같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설씨는 피해자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교사를 사칭해 약 2년7개월 동안 명목을 달리하면서 반복적으로 약 16억원을 편취했다”며 “피해자는 재산적 손해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고 피해 회복이 이뤄진 부분은 1억1000만원으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판결했다. 설씨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