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2000년대 초반 핀펫(FinFET)이란 3차원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고 특허를 출원한 뒤 국내 반도체회사에 기술 이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1년여에 걸친 이 교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이 기술을 채택하지 않았다. 결국 이 기술은 미국 인텔에 이전됐다. 인텔은 그의 특허에 기반해 3차원 소자기술을 적용한 반도체 제품을 2011년부터 생산했다. 60여년 반도체 역사에서 최초로 3차원 소자를 중앙처리장치(CPU) 생산에 적용한 기업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 교수는 “비메모리 반도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한국 기업이 장식할 기회를 놓쳤다”며 안타까워했다.
2009년 완공한 인천대교 전경.  ♣♣한경DB
2009년 완공한 인천대교 전경. ♣♣한경DB
2009년 완공된 인천대교는 한국 자체 기술로 장대교(長大橋)를 건설한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초기 프로젝트 기획과 시스템 디자인 기술 같은 ‘개념설계’는 일본(설계)·캐나다(엔지니어링)·영국(투자 및 기술) 회사의 도움을 받았다. 가장 기본적인 설계부문에서도 중요하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아이디어는 외국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개념설계는 전체 프로젝트 예산의 10~15%를 차지할 정도로 표준기술에 비해 부가가치가 훨씬 높은 영역이다. 인천대교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 참여한 고현무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2013년 완공한 이순신대교는 기획부터 전체를 한국 독자 기술로 건설했지만 아직 우리나라 프로젝트 기획 역량의 경쟁력은 매우 떨어지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공대 교수 26명이 한국 산업 기술의 위기를 진단, 분석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한 《축적의 시간》에 소개된 내용이다. 미국 독일 등 선진국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처지가 돼 성장과 경쟁력의 위기에 몰린 한국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 책은 서울대 공대가 2013년부터 ‘메이드 인 코리아’의 도전과 과제를 주제로 진행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서울대 공대는 우선 반도체 조선 건설 자동차 등 한국 산업의 중심 분야를 대표하는 26명의 교수진을 선정하고 이들에게 심층 인터뷰 형식으로 각 분야의 현황과 문제의 원인을 물었다.

교수들은 산업계가 처한 현실과 넘어서야 할 과제, 중국의 부상에 대한 대응, 대학의 역할과 산학 협력의 과제, 국가정책의 보완점 등 여섯 가지 화두를 기반으로 각자의 세부 영역을 분석하고 실제적인 대응방안을 제시했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이정동 산업공학과 교수는 대표 집필을 맡아 인터뷰에서 추출한 공통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가 얻을 수 있는 유용한 통찰을 1부에서 요약해 제시하고, 2부에서 개별 인터뷰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했다.

교수들이 분야에 상관없이 위기의 원인으로 가장 많이 제기한 키워드는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다. 문제의 속성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고 창의적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창조적 역량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독특한 해양환경을 극복하고 작동해야 하는 해양플랜트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제시하는 역량, 새로운 화학물질이나 기술을 생산해내는 프로세스를 최초로 설계하는 역량, 사물인터넷이란 새로운 기술플랫폼에 기반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하는 역량 등이다.

교수들은 지금껏 한국 산업의 발전모델이 선진국이 제시한 개념설계를 빠르게 모방, 개량하면서 생산하는 모방적 실행 전략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이 과정을 한국과 같이 성공적으로 빠르게 밟아온 나라가 없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지만 이제는 이 같은 성장모델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가치사슬의 가장 앞단에 있는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을 축적하지 않고는 진정한 산업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문제는 축적된 경험 없이는 개념설계 역량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 진정한 문제의 원인은 창조적 축적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빠른 벤치마킹을 우선하는 모방·추격형 발전 모델의 그림자”다. 선진국은 오랜 산업의 역사에서 축적한 역량이 탄탄하게 구축돼 있고, 중국은 거대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체계적으로 축적하면서 개념설계의 역량을 급속히 높이는 중이다.

이정동 교수는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앞으로 중국의 개념설계를 받아 와 생산해서 중국에 납품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우리 산업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해법은 긴 호흡으로 경험을 쌓아가기 위한 ‘축적의 시간’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오랜 역사도, 거대한 내수시장도 없는 한국 산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 차원의 축적 노력으로는 선진국과 중국의 축적된 경험을 이길 수 없다. 책의 잠정적인 해답은 사회 전반의 인센티브 체계, 문화를 바꿔 기업뿐 아니라 대학 정부 등 사회의 모든 주체가 축적을 지향하도록 변화해 나가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동원하고, 항상 정해진 목표를 조기에 초과 달성하는 한국형 성공 방정식은 끝났다”며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시행착오의 과정과 결과를 꼼꼼히 쌓아가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