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늪에 빠진 우리 경제는 ‘중후장대(重厚長大) 몰락, 경박단소(輕薄短小) 부상’으로 요약된다. 엇갈린 운명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중후장대 제조업이다. 문제는 성장의 네 바퀴(자동차, 조선, 철강, 정유·유화)가 모두 삐걱거린다는 점이다.
공급과잉에 양산시스템 한계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기업이 사면초가라는 S&P의 경고는 뼈아프다. S&P는 저성장, 저수익, 지배구조 저투명성에다 한국 제품의 매력도 저하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선진국엔 질에서 밀리고, 중국엔 양과 가격에서 밀리는 샌드위치다. 안 팔리는 데야 뾰족한 수가 없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를 제외한 국내 150대 기업의 영업이익률이 2010년 8%에서 지난해 3.5%로 추락했고, 생산성은 답보상태이며, 순차입금은 40%나 늘어난 게 그 결과다. 게다가 삼성전자 현대차도 고전 중이니 반박할 여지가 없다.
물론 핑곗거리가 없진 않다. 세계 경기 둔화, 엔저, 중국 쇼크가 겹쳤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동반 몰락을 설명하기엔 미흡하다. 근본 원인은 세계적인 공급 과잉에 있다. 산업혁명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중국에서 완성됐다. 중국이 뛰어든 분야마다 재고가 쌓여 간다. 90년대 미미했던 중국이 세계 철강의 50%를 생산하는 판이다. 중국이 사주면 대박이지만 중국이 만들면 쪽박이 된다. 오죽하면 “중국에 대해선 분석하지 말고 기도하는 편이 낫다”고 할 정도다.
이런 때일수록 사업재편을 통한 고강도 구조조정이 필수다. 하지만 기업들은 실패가 두렵고, 정부는 수단이 없다며 엉덩이를 뺀다. 임기 중 단기 실적에 급급한 경영행태, 관료화된 조직문화로는 어림없다. 강제 구조조정을 가능케 했던 외환위기가 차라리 ‘위장된 축복’이었던 이유다.
소비재처럼 유연해져야 산다
20세기 중후장대 산업은 대규모 투자와 대량생산에서 비교우위를 가졌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투자를 종용해도 투자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 공급 과잉 속에 차별화 없는 투자는 자해행위다. 결국 중후장대 제조업도 양이 아닌 질, 나아가 질을 초월한 가치가 뉴노멀이 됐다. 중후장대도 다품종 소량생산의 경박단소처럼 유연해질 때 길이 보인다는 얘기다.
그 바탕이 부품·소재다. 20년간 집중 투자로 부품에선 성과를 냈지만 소재는 거의 불모지다. 예컨대 현대차의 디자인 성능은 톱클래스지만 주관적 승차감에선 독일 차에 비해 아직 떨어진다. 그 미세한 차이가 강판의 질에서 나온다. 포스코는 도요타 포드 폭스바겐에 강판을 공급하지만 벤츠 BMW는 못 뚫고 있다. 포스코가 잘해야 현대차도 잘되는 공동운명체인 셈이다.
숨가쁘게 선진국 꽁무니까진 쫓아갔지만 남은 한 걸음을 따라잡기가 너무 버겁다. 그럴수록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업가 정신이 절실하다. 그런데 ‘하면 된다’던 기업가들의 투지가 언제부턴가 ‘하면 안 된다’는 보신주의로 변질된 느낌이다.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지 않은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