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제공
포스코 제공
군인 꿈꾸던 가난한 산골소년
포철공고 진학하며 ‘기술인 되자’ 결심
포철 입사 후 4년간 단순 업무만

기술인생 날개 달아준 광양제철소
새 설비·장비 등 설계도·숫자 통째 외워
배운 걸 잊지 않으려 꼼꼼히 기록 시작

34년 기술역정…“회사가 스승”
사무실 근무로 ‘숲’을 보는 안목까지
회사 덕에 배운 기술 돌려줘야죠


1650도의 온도에서 쇳물이 펄펄 끓고 있는 포스코 광양제철소 1제강공장. ‘포스코 제1호 명장’에 오른 조길동 부장(54·사진)은 기자가 찾은 지난 26일에도 땀에 흠뻑 젖은 채 제강 공정에 매달리고 있었다. 제강 공정이란 철광석을 녹인 쇳물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뒤 각종 강판의 재료가 되는 슬래그를 만드는 작업이다. 조 부장은 제강 분야에서 최고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다른 분야의 3명과 함께 지난 6월 ‘포스코 명장’에 선정됐다.

“기술도 조금씩 쌓이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생겨 천지를 개벽하는 기술은 없습니다. 부단히 고치고 바꿔나가면 그게 곧 기술의 진보죠.”

명장에 오른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비법이 뭐가 있겠느냐”며 이같이 설명했다.

집념과 끈기로 써내려 온 ‘제강실록’

포스코에는 ‘제강실록’이라는 작업표준서가 있다. 제강 공정의 각종 설비구조, 조업 프로세스, 제어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된 책자다. 이 책자의 작성자는 조 부장이다. 그는 1987년 4월28일 1제강공장 준공 후 첫 조업부터 1998년 5월1일까지 10여년에 걸쳐 작업내용과 조업사고 발생 및 조치 상황 등을 꼼꼼히 기록해왔다. 100권 정도에 한 권이 1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100권의 작업기록엔 제강 기술에 대한 저의 모든 노하우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광양제철소에 온 것은 1986년. 1982년 포항제철공고 제강과를 졸업하고 입사한 포항제철소에서 4년 반 동안 단순 업무만 맡았다. 쇳물을 전로에 부을 때 신호를 보내는 일이 다였다. 광양제철소가 건설된다고 하기에 손을 들었다. “기술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열망이 컸던 시절이었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광양제철소에서 그는 매일 공장을 여러 바퀴 돌았다. 새로운 설비와 장치를 수도 없이 관찰했다. 설계도면과 수치 등은 아예 통째로 외웠다. 의문이 가는 부분은 엔지니어에게 묻고, 공급사가 준 설명서를 뒤져 익혔다. “배울 게 너무 많았죠. 그런데 배운 걸 까먹지 않으려면 기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무엇이든 글로 옮기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렸습니다.”

엄격한 일처리로 얻은 별명 ‘독사’

매서운 눈매에 단호한 표정. 그는 딱딱한 이미지의 쇠와 묘하게 어울리는 그런 인상을 지녔다. 그래서일까. 주변 사람은 그에게 ‘독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하지만 정작 별명이 생긴 사연은 일 때문이었다.

광양제철소에선 1998~2005년 아날로그 설비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전산망을 새로 깔고 기계설비, 로봇작동 프로그램 등과 함께 전로 등의 노후 설비들이 대폭 교체됐다. 이 작업에 참여한 조 부장은 작업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꼼꼼히 살폈다. 어떤 때는 체크를 위해 몇 날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래도 안되겠다 싶으면 재작업을 벌였다.

작업이 모두 마무리되고 뒤풀이하던 중 동료 직원이 그에게 ‘독사’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회사의 미래가 걸린 중대사인 만큼 소홀히 넘길 수 없잖아요. 모두들 같이 완벽하게 하자고 했죠. 퇴직한 선배들과는 지금도 연락하며 가깝게 지냅니다.”

후배 직원에게도 별명은 공감을 받았다. 그는 유독 기술교육에서만큼은 후배들을 엄격하게 대했다. 두세 번 설명듣고도 이해를 못하면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혹독하게 교육했다. 그는 “신입직원 시절 제대로 가르쳐준 선배를 못 만난 것이 가슴에 남아 교육만큼은 철저히 했다”며 “그래도 명장 선발에 다면평가항목이 있는데 후배들이 후한 점수를 줘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전체 시스템 익힌 것이 큰 도움

작업현장을 세세히 살피고 기록하는 그의 노력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옮겨온 초기 광양제철소에는 시스템이 채 갖춰지지 않은 탓에 설비 가동 중 사고가 꼬리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파트장은 직원들을 모아 놓고 사고 원인과 방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사고를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그는 입사 10년 만인 1992년 주임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후배 직원들의 울타리가 되려다 보니 상사들과 자주 부딪힌 것이 화근이 됐다. 승진 6년 만에 그는 현장에서 밀려났다. 주임 직책도 잃었다. 희망이 없었다. 아예 회사를 때려치울까도 생각했다. “그만두면 뭐 먹고 살려 하느냐”며 부인이 매달려 겨우 마음을 돌렸다. 현장에서 떠나 사무실 근무로 바뀌었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길러져 큰 도움이 됐다”고 조 부장은 회고했다. 2008년에도 현장을 떠나 혁신지원팀에서 근무할 때 회사 전체 시스템이 비로소 한눈에 들어왔다.

이 무렵 그의 기술역량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1998년부터 제강자동화 시스템 구축과 업그레이드, 불순물인 인 성분을 획기적으로 제거하게 된 전로 더블 슬래그 조업기, 제강 리드타임 관리기술 개발 등 생산성과 품질을 향상시키는 핵심기술을 잇따라 내놓았다.

“그간 익힌 기술 회사에 돌려줄 것”

그의 어릴적 꿈은 군인이었다. 활동적인 것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가난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는 전남 순천시 주암면 광천리에서 산골로 한참 들어가야 하는 깡촌에서 1남3녀 중 늦둥이로 태어났다. 우수한 학업성적에도 불구하고 고교 진학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그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포철공고에 진학하면서 다시 꿈을 꾸게 됐다. 33년간 땀흘려 일한 덕에 ‘장인’으로 올랐으니 어느 정도 꿈을 이뤘다고 한다. 2남1녀를 키우고 대학교에 진학시킨 것에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은퇴 전까지 두 가지는 꼭 하고 싶다고 했다. 틈틈이 기록하고 있는 작업장 일지로 제강실록 속편을 내는 것이 그 하나다. 나머지는 후배들에게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모두 전해주는 일이다. “저의 기술 스승은 회사입니다. 모든 것을 현장에서 배웠으니까요. 제가 은퇴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습득한 기술을 다시 회사에 돌려주는 일입니다.”

■ 조길동 명장이 전하는 제철소 작업장
쇳물 녹이며 발생한 복사열에 숨이 턱턱…금세 온몸 땀 범벅

광양제철소 제1공장 내 제강 작업장의 문을 열면 먼저 뜨거운 열기가 덮쳐온다. 세 개의 전로(제강 고로)에서 쇳물을 녹이면서 발생한 복사열이다. 이 열로 숨은 턱턱 막히고 온몸은 금세 땀으로 범벅이 된다. 이런 작업환경은 종종 ‘극한직업의 세계’라는 TV 프로그램의 단골메뉴로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조길동 포스코 명장은 제철소 작업장을 ‘총성 없는 전쟁터’에 비유했다. 머리에서 느끼는 열기는 몸에서 느끼는 열기 이상이라고 했다. 기술 경쟁 때문이다.

그는 “기술은 공장이 가동되는 한 끊임없이 개발돼야 하는 게 숙명”이라며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경쟁력은 회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고 말했다.

작업장은 또 현장문화가 중시되는 곳이다. 여기에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의 문화, 기술, 공정을 개선하려는 자발적 의지 등이 있다. 그는 “포스코는 차별화된 현장문화가 잘 유지되는 것이 최대 강점”이라며 “이는 곧 회사의 미래를 밝히는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광양제철소처럼 제선(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공정)과 제강, 압연(가공철판을 만드는 과정) 공정을 모두 갖춘 일관제철소는 24시간 가동되는 게 특징이다. 식사도 주간 근무조는 교대로, 나머지는 틈틈이 짬을 내 개별적으로 해결한다. 이렇다 보니 작업장 사무실에 딸린 회의실은 식당으로도 활용된다. 그는 “제철소는 일반 기업과 달리 산업의 초석을 놓는 국가 기반시설”이라며 “사명감을 갖고 융화와 소통할 수 있는 젊은이라면 도전해볼 만한 직장”이라고 소개했다.

광양=최성국 기자 sk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