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지드와 카뮈, 모파상, 생텍쥐페리가 좋아했던 지중해 휴양지 중의 휴양지 튀니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집과 파란문의 대조가 절묘하다.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이 ‘튀니지언 블루’에 반했다. 튀니지언 블루는 1920년 프랑스 화가 로돌프 데를랑게르가 이곳 자연에 매료돼 창문과 대문을 파란색으로 칠한 데서 비롯됐다. 그리스의 산토리니와 닮았다고 ‘리틀 산토리니’로 부르기도 한다.

이 멋진 풍광 속에는 아픈 역사가 감춰져 있다. 아프리카 북쪽 끝의 ‘빵 바구니’라는 별칭처럼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였기에 예부터 이곳을 탐내는 세력이 많았다.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8세기에 카르타고를 세우고 해상무역으로 패권을 잡은 뒤 명장 한니발로 로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세 번의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 완패했다. 기원전 146년 당시 카르타고 인구 25만명 중 20만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5만명도 노예로 팔렸다. 가공할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학살)의 현장이었다.

이후 로마 속주에 이어 반달족(5세기)과 비잔틴제국(6세기), 아랍족(8세기), 스페인과 오스만튀르크(16세기), 프랑스(19세기)의 지배를 받았다. 2차대전 때도 유명한 ‘튀니지전투’의 비극을 겪었다. 인구 1000만명의 신생국으로 독립한 것은 1956년이었다. 이민족 통치가 계속되면서 페니키아 유적은 거의 다 파괴되고 말았다.

그나마 국립 바르도박물관에서 모자이크 예술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수메르에서 시작된 모자이크는 카르타고와 그리스, 로마, 비잔틴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했다. 바르도박물관은 세계 최고의 모자이크 박물관으로 ‘아프리카의 루브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이곳은 석 달 전 수십명이 희생된 테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시작된 곳이어서 그럴까. 아직도 튀니지의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저께 해변의 휴양객을 상대로 한 테러가 또 터졌다. IS를 추종하는 대학생이 난사한 총에 38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해변을 찾은 휴양객을 무참하게 살해한 현장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IS 건국 1주년을 앞두고 프랑스와 쿠웨이트에서도 테러가 발생해서 공포가 더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튀니지언 블루가 어쩌다 이렇게 슬픈 색깔로 바뀌었을까. 블루의 뜻이 파란색뿐만 아니라 우울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슬람에서는 원래 ‘재앙, 고통’을 의미하는 파란색을 거의 쓰지 않았다니 더욱 그런 생각을 해본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