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시오 '수련 동굴'서 핀 청빈·관용…교황의 화합정신 보는 듯 절로 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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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가톨릭 성지를 가다 (上)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적 근원을 찾아
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로 이어지는 성 이냐시오 순례길
생가와 기념성당엔 정교회·이슬람 교인들 발길도 이어져
로욜라·몬세라트·만레사로 이어지는 성 이냐시오 순례길
생가와 기념성당엔 정교회·이슬람 교인들 발길도 이어져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취임 직후부터 노숙인과의 생일파티, 소형차 타기, 미혼모 세례, 다른 종교 포용 등 파격적인 행보로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지난해 8월 방한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자들의 벗’이라 불리는 그의 청빈하고 관용적인 태도는 “청빈을 어머니처럼 사랑하라”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왕궁 안에 있다”는 예수회 창설자 성(聖)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영성의 근원을 찾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함께 스페인 북동부 로욜라, 몬세라트, 만레사로 이어지는 성 이냐시오 순례 길을 찾았다. 수도원을 개혁을 위해 ‘맨발의 가르멜 수도원’을 설립한 성녀 데레사의 도시 아빌라, 성 야고보의 순례길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도 순례했다. 그 여정을 차례로 소개한다.
지난 11일 스페인 동북부 몬세라트에서 약 15㎞ 떨어진 만레사 마을의 카르도네르 강변에 있는 동굴 경당. 10㎡ 남짓한 동굴 정면에는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가 절벽 아래로 펼쳐진 마을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적고 있는 모습이 부조돼 있다. 한 50대 여성 순례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래도록 묵상에 잠겼다.
만레사 동굴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속한 예수회의 창시자인 성 이냐시오가 1522년부터 1년간의 수련 끝에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경당에 부조된 성 이냐시오는 그 깨달음의 내용을 기록 중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오른편에는 이냐시오 성인이 수련하던 동굴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경당 입구에는 이냐시오 성인이 구걸할 때 사용한 올리브나무로 만든 그릇과 당시 동굴로 통하던 문이 전시돼 있다.
만레사 동굴 경당에는 세계에서 찾아오는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순례객은 4만4000여명.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 떨어진 로욜라에 있는 성 이냐시오 생가 및 기념성당은 지난해 10만여명이 방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한 뒤 생가와 기념성당을 찾는 순례자가 25%나 늘었다고 한다. 한국인 방문객도 4000명을 넘는다.
생가로 들어서자 예수회 소속 한국인 사제가 직접 해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1491년 스페인 기푸스코아 지방의 로욜라성에서 태어난 이냐시오는 1521년 팜플로나전쟁에 출전했다가 다쳤다. 로욜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우연히 종교 서적 《그리스도의 생애》 《성인들의 꽃》 등을 읽은 그는 기사로서의 삶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성인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때 이냐시오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본다. 그 길로 이냐시오는 해발 723m의 산중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산타마리아 데 몬세라트 대수도원으로 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을 ‘블랙 마돈나’라 불리는 목각 성모상에 봉헌한다.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옷을 거지에게 준 그는 포대로 짠 넝마 옷을 걸친 채 1522년 3월25일 만레사 마을 강변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1년간 하루 7시간씩 기도와 극기, 명상에 몰입했다. 구걸로 연명했다. 이때 경험한 신비한 체험과 영적 통찰을 기록한 책이 이후 500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쇄신에 크게 이바지한 ‘영성수련’이다.
16세기 중반, 세속화되고 부패한 교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를 계기로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1534년 예수회를 창설하고 청빈, 정결, 순명, 적응주의 선교를 내세우며 가톨릭 부흥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냐시오 성인은 동료 수도자들에게 “청빈을 어머니처럼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온 예수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가난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적인 관심과 인기를 한몸에 받는 것은 그런 가난의 영성을 몸소 실천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또 다른 장점은 다른 종교 신자까지도 포용하는 모습이다. 이냐시오 생가와 기념성당도 다르지 않았다. 순례객 중에는 러시아정교회, 개신교, 이슬람 신자들도 많았다. 1991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던 이냐시오 생가 4층 회심의 소성당은 이곳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장소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성공회, 러시아정교회 등에서 미사를 봉헌하겠다고 요청하는 경우에도 이곳을 내준다. 이냐시오 생가 및 기념성당 총 책임자인 아이노와 빌라는 “이냐시오 정신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왕궁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그래서인지 이슬람교도가 로욜라에서 영성 수련을 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스페인은 로마 지배 이후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 종교 간의 끊임없는 갈등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교도를 축출하기 위해 종교재판이 성행했고, 유대인을 15만명 가까이 추방했다. 스페인 가톨릭에서 ‘관용’의 정신이 싹튼 것은 이렇게 수많은 희생을 치른 결과가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목요일 전례 때 로마의 소년원에서 이슬람 재소자들의 발을 씻겨 준 일화는 예수회의 포용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예수회의 영성을 요약하는 또 다른 구절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에게 하느님은 교회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고 모든 사람 안에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걸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고 있다.
로욜라(스페인)=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지난 11일 스페인 동북부 몬세라트에서 약 15㎞ 떨어진 만레사 마을의 카르도네르 강변에 있는 동굴 경당. 10㎡ 남짓한 동굴 정면에는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가 절벽 아래로 펼쳐진 마을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적고 있는 모습이 부조돼 있다. 한 50대 여성 순례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래도록 묵상에 잠겼다.
만레사 동굴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속한 예수회의 창시자인 성 이냐시오가 1522년부터 1년간의 수련 끝에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경당에 부조된 성 이냐시오는 그 깨달음의 내용을 기록 중이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오른편에는 이냐시오 성인이 수련하던 동굴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경당 입구에는 이냐시오 성인이 구걸할 때 사용한 올리브나무로 만든 그릇과 당시 동굴로 통하던 문이 전시돼 있다.
만레사 동굴 경당에는 세계에서 찾아오는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순례객은 4만4000여명.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 떨어진 로욜라에 있는 성 이냐시오 생가 및 기념성당은 지난해 10만여명이 방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한 뒤 생가와 기념성당을 찾는 순례자가 25%나 늘었다고 한다. 한국인 방문객도 4000명을 넘는다.
생가로 들어서자 예수회 소속 한국인 사제가 직접 해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1491년 스페인 기푸스코아 지방의 로욜라성에서 태어난 이냐시오는 1521년 팜플로나전쟁에 출전했다가 다쳤다. 로욜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우연히 종교 서적 《그리스도의 생애》 《성인들의 꽃》 등을 읽은 그는 기사로서의 삶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성인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는다.
이때 이냐시오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본다. 그 길로 이냐시오는 해발 723m의 산중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산타마리아 데 몬세라트 대수도원으로 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을 ‘블랙 마돈나’라 불리는 목각 성모상에 봉헌한다.
자신이 입고 있던 값비싼 옷을 거지에게 준 그는 포대로 짠 넝마 옷을 걸친 채 1522년 3월25일 만레사 마을 강변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1년간 하루 7시간씩 기도와 극기, 명상에 몰입했다. 구걸로 연명했다. 이때 경험한 신비한 체험과 영적 통찰을 기록한 책이 이후 500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영적 쇄신에 크게 이바지한 ‘영성수련’이다.
16세기 중반, 세속화되고 부패한 교회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큰 위기에 봉착했다. 이를 계기로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1534년 예수회를 창설하고 청빈, 정결, 순명, 적응주의 선교를 내세우며 가톨릭 부흥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냐시오 성인은 동료 수도자들에게 “청빈을 어머니처럼 사랑하라”고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온 예수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가난하고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적인 관심과 인기를 한몸에 받는 것은 그런 가난의 영성을 몸소 실천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또 다른 장점은 다른 종교 신자까지도 포용하는 모습이다. 이냐시오 생가와 기념성당도 다르지 않았다. 순례객 중에는 러시아정교회, 개신교, 이슬람 신자들도 많았다. 1991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던 이냐시오 생가 4층 회심의 소성당은 이곳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장소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성공회, 러시아정교회 등에서 미사를 봉헌하겠다고 요청하는 경우에도 이곳을 내준다. 이냐시오 생가 및 기념성당 총 책임자인 아이노와 빌라는 “이냐시오 정신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왕궁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그래서인지 이슬람교도가 로욜라에서 영성 수련을 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스페인은 로마 지배 이후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 종교 간의 끊임없는 갈등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교도를 축출하기 위해 종교재판이 성행했고, 유대인을 15만명 가까이 추방했다. 스페인 가톨릭에서 ‘관용’의 정신이 싹튼 것은 이렇게 수많은 희생을 치른 결과가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목요일 전례 때 로마의 소년원에서 이슬람 재소자들의 발을 씻겨 준 일화는 예수회의 포용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예수회의 영성을 요약하는 또 다른 구절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에게 하느님은 교회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고 모든 사람 안에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걸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고 있다.
로욜라(스페인)=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