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전망과 계획을 허위로 공시해 투자자가 피해를 봤다면 기업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왔다. 그동안 분식회계 등 경영진의 불법행위로 인한 투자자 피해에 대해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례는 많았으나 사업 전망 공시만으로도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자본시장법상 제척기간(소송을 걸 수 있는 시효)이 지난 사건에 대해 민사상 책임을 인정해 비슷한 손해를 본 투자자의 소송이 잇따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14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개인투자자 이모씨가 코리아본뱅크의 이모 전 대표와 김모 전 이사, 회사법인을 상대로 한 3억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 판결을 확정, 피고 측이 원고에게 총 9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허위 사실을 담은 공시를 보고 정상 주가보다 높은 가격에 신주를 인수하고 비정상적으로 높게 형성된 주가를 정상 주가로 오인해 주식을 매수해서 손해를 본 사실이 인정된다”며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원심은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허위공시, 이젠 민법상 손배책임"

앞서 코스닥 상장사 코리아본뱅크 대표이던 이모씨는 2006년 유상증자를 앞두고 ‘반도체·레이저 분야 신사업 진출을 앞두고 있으며 해외 기술을 국산화한 제품 출시 계획이 있다’는 내용의 공시를 했다. 그러나 유상증자로 얻은 자금을 신사업에 투입하지 않고 계열사에 출자한 뒤 대손상각 처리했다. 당초 1000원대 초반이던 주가는 공시 이후 꾸준히 올라 한때 2000원까지 뛰었으나 유상증자 이후 급락해 200원대까지 떨어졌다. 1050원에 30만여주를 유상증자받은 것을 포함해 80만여주를 매수한 투자자 이씨는 주가 급락으로 주당 400원 안팎에 주식을 전량 매도해 수억원대 손실을 봤다.

1심은 “코스닥시장이 전반적으로 하락세였고 허위 공시만으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2심은 경영 정황상 이를 주가조작 행위로 보고 판단을 뒤집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신사업에 진출하거나 제품을 국산화하기가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허위 공시 행위로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형성됐다”며 “원고는 이를 모른 채 매수했으므로 피고는 민법상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사업 전망에 대한 허위 공시만을 이유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이번 판결은 향후 비슷한 소송에 영향을 줄 전망이다. 그동안 H&T, 글로웍스 등 경영진의 허위 공시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이 비슷한 소송을 제기해 1, 2심에서 승소한 경우는 있으나 확정판결은 나지 않았다.

법조계는 또 이번 판결이 경영진의 허위 공시에 대해 자본시장법상 책임이 아니라 민법상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주가조작 등 자본시장법상 범법행위에 대한 제척기간은 인지 시점으로부터 1년, 행위를 한 때로부터 3년인 데 반해 민법상 제척기간은 안 때로부터 3년, 행위 때로부터 10년으로 훨씬 길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