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금표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멕시코시티 본사에서 화물 운송을 준비하고 있다. 정인설 기자
홍금표 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멕시코시티 본사에서 화물 운송을 준비하고 있다. 정인설 기자
멕시코에서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마약 및 폭력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줄잡아 8만여명에 달한다. 2010년부터 5년간 납치 사건으로 죽은 사람도 480여명에 이른다. 대부분 멕시코 갱단 소행이다. 이들이 노리는 대표적 표적 중 하나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대형 트럭이다.

그래서 멕시코에선 “물류업에 뛰어들려면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한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홍금표 판트란스 사장(57)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다들 꺼리는 물류 사업에서 성공한 주인공이다. 법적으로 물류업을 할 수 없는 외국인 신분으로 사업을 시작해 판트란스를 멕시코 내 유일한 종합 물류업체로 키워냈다.

◆멕시코 유일 종합 물류업체로

홍 사장은 택배업 같은 일반 물류업을 하는 게 아니다. 100t에 가까운 대형 운반물을 수백㎞씩 옮겨주는 특수 운송업이 본업이다. 판트란스는 멕시코 세관 통관업무부터 물건을 저장하는 창고업, 목적지까지 이송하는 운송업을 모두 수행하는 멕시코 내 유일한 종합 물류업체다.

물류업에서 시간은 돈으로 통한다. 제때 운송하지 못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홍 사장의 생각은 다르다. ‘신속보다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가 취급하는 품목이 작은 탈이 나도 수억원의 손해를 보는 유류 탱크나 발전기 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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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인이 맡긴 물건을 애지중지하다 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지름이 10m 이상인 수십억원짜리 초대형 연료관을 옮기다 도로 위로 난 고가다리를 통과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고가다리 높이가 너무 낮아 통과가 불가능했다. 돌아갈 길도 없었다. 홍 사장은 결국 임시 다리를 건설한 뒤 고가다리를 해체하고 화물을 통과시켰다. 통과 후 다리는 한 달 만에 복원했다. 돈도 3억원 이상 들었다. 그래도 거래처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형 화물을 옮기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나 주변 가로수를 손상시켜 원상복구해준 일도 많다. 홍 사장은 “초대형 화물을 취급하면 난감할 때가 많다”며 “그래도 결국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면 고객이 맡긴 물건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전·소통으로 거래처 신뢰

판트란스 특수차량
판트란스 특수차량
홍 사장이 사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안전과 소통이다. 지난 3월 30만달러어치의 휴대폰을 멕시코시티에서 북쪽 미국 국경 방향으로 옮길 때의 일이었다. 휴대폰은 갱단이 탐내는 물건이다. 그런 만큼 앞뒤로 무장 호송 차량을 대동하고 방탄조끼를 착용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트럭 위치를 경찰에게 알려줄 수 있는 위성항법장치(GPS)도 챙겼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갱들이 찾을 수 없는 곳에 GPS를 숨겨뒀다. 모든 대비를 했지만 트럭 세 대 중 가장 뒤에 오던 한 대가 털리고 말았다. 갱들은 전파무력장치로 GPS를 교란시켰다. 시간이 없어 지름길을 이용한 게 탈이었다.

홍 사장은 “물건을 수송할 때 지름길보다 무조건 안전한 고속도로를 이용하도록 한다”며 “회사를 경영할 때도 조금 멀더라도 넓고 큰 길을 가는 게 나중에 생각해보면 훨씬 빠른 길이 된다”고 강조했다.

거래처와의 소통은 그가 사업 초기부터 가장 중요시한 덕목이다. 지금은 휴대폰이 있어 거래처에 바로바로 운송 상황을 보고할 수 있다. 그러나 휴대폰이 없던 시절엔 공중전화가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다. 도착해서 보고해도 되지만 홍 사장은 공중전화가 보일 때마다 “아무 이상 없이 물건을 잘 옮기고 있다”고 전해줘 화물주를 안심시켰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일일보고서를 팩스로 보냈다. 이런 신뢰가 그의 사업 성공의 기반이 됐다. 2005년 100만달러도 되지 않던 매출은 지난해 1800만달러로 늘었고, 올해 2000만달러를 돌파할 전망이다.

◆교수 지망생이 사업가로 변신

홍 사장은 원래 교수가 되고 싶었다. 1984년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를 중퇴하고 멕시코로 떠날 때도 “학비가 싼 멕시코에서 공부하고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직을 잡아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 있던 돈은 1500달러 남짓. 학비는 18시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벌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폐쇄적인 한국 교수사회로 돌아가는 것보다 가능성있는 멕시코에서 사업을 해보자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현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뒤 취직한 곳이 한국인이 운영하던 한 의류 원단업체였다.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일한 뒤 1991년 “내 사업을 하자”고 마음먹고 나와 차린 회사가 판트란스의 전신인 코라멕스다. 이후 거래처였던 미국 운송회사 사장이 “멕시코에서 직접 운송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한 게 물류업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외국인에게 물류업 허가를 내주지 않아 멕시코 직원을 회사 대표로 세웠다.

홍 사장은 “강원 정선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설악산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안데스 고원을 다니며 물건을 실어 나르는 물류업이 딱 내 체질에 맞았다”고 말했다.

◆위기 딛고 대통령 표창

사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00년 직원 실수로 회계장부를 잘못 쓴 게 화근이었다. 가산세까지 100억원 이상을 추징당할 위기에 놓였다. 5년치 회사 이익을 날리고 회사 문을 닫을 상황이었다. 단순 실수였지만 멕시코 국세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멕시코 관리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지만 정도 경영을 외치던 홍 사장은 정식 소송을 제기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2002년엔 국세청으로부터 기습적인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때 사업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정공법으로 다시 소송을 냈다. 6년간의 싸움 끝에 일부 승소했다. 강한 대응에 당황했는지 더 이상 국세청 세무조사는 없었다.

홍 사장은 이제 멕시코 현지에서 성실 납세자로 대우받는다. 한국에서도 성공한 한인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2012년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표창을, 2013년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런 명성이 쌓이면서 작년엔 기아자동차 멕시코 공장의 공식 물류업체로 선정됐다. 멕시코에 있는 현대자동차그룹과 삼성그룹 계열사도 모두 홍 사장을 믿고 일을 맡겼다. 홍 사장은 “어떤 사업을 하든 위기와 역경은 있지만 일을 즐기면서 하다보면 결국 문제는 풀리는 것 같다”며 “긍정적인 자세로 임하면 사업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멕시코 시장 뚫으려면…

[한계돌파] "고객 약속이 우선"…물건 하나 배달 위해 3억 들여 다리까지 놨다
류제현 파스코 사장 "中 관시처럼 인맥 중요…유행 안 타는 B2B 공략해야 성공확률 높아"

중국의 관시(關係)나 중동의 와스타(wasta·관계)처럼 중남미에서도 인맥이 중요하다. 사업 목적으로 스페인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접하는 단어 중 하나가 친구를 뜻하는 아미고(amigo)일 정도다.

뒤집어 말하면 인맥이 부족한 외국인이 멕시코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정부나 공공기관을 상대로 일해야 하는 전력시장이나 통신시장에선 더욱 그렇다. 한국 대기업도 이 시장에선 대부분 고배를 마셨다.

류제현 파스코 사장(사진)은 이런 시장에서 당당히 성공했다. 한국산 전선이나 멕시코에서 직접 만든 전선을 통신업체 등에 공급해 지난해 멕시코 광케이블시장에서 27%의 점유율로 1위에 올랐다. 2010년 파스코를 설립한 지 4년 만이다. 올해는 작년의 두 배 수준인 4500만달러 이상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류 사장의 성공 비결은 1988년부터 20년간 삼성전자와 팬택의 멕시코법인에서 근무하면서 현지 인맥을 넓힌 덕분이다. 그는 “한 번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끝까지 챙긴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한인 사회의 선후배보다 멕시코인을 더 챙길 정도다. 그는 “인맥 관리 노하우나 기술이라기보다 멕시코에 늘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다보니 그만큼 돌아오는 게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손해를 보고 물건을 공급한 일도 있었다. 2013년 국내 대형 전선업체가 납기를 어겨 멕시코 최대 방송국인 텔레비사에 제때 납품을 할 수 없게 됐다. 이때 류 사장은 선박 대신 비행기로 물건을 실어날라 납기를 겨우 맞췄다. 이 일로 30만달러의 손해를 봤지만 이후 텔레비사는 계약 물량을 확 늘렸다. 류 사장은 “당장 손해가 나더라도 오랜 기간 신뢰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에선 유행이 빨리빨리 바뀌는 B2C(기업 소비자 간 거래)사업보다 한 번 구축한 관계를 통해 오랜 기간 가져갈 수 있는 B2B(기업 간 거래)사업을 하는 게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멕시코시티=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