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시장실패에 대한 오해가 과잉규제 불러…정부 개입의 대부분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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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14> 시장실패의 우화
정부가 공급하는 재화·서비스를 공공재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
불완전·비효율 구분하지 않고 시장실패 개념을 오남용하면
정부 규제·개입을 선호하게 돼
정부가 공급하는 재화·서비스를 공공재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
불완전·비효율 구분하지 않고 시장실패 개념을 오남용하면
정부 규제·개입을 선호하게 돼
등대와 꿀벌.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경제학에서 ‘시장의 실패’를 상징하는 소재로 많이 인용된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정부가 왜 시장에 개입해야 하고, 시장을 대신해야 하는지를 주장할 때 등대와 꿀벌이 강력한 설득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시장경제는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원이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시스템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가격을 의미한다. 가격에는 우리 모두가 의사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집약돼 있다.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면 사려는 사람은 줄고 만들어 팔려는 사람은 늘어난다. 가격이 생각보다 싸면 수요량은 늘고 공급량은 준다.
정부를 포함한 누군가의 강제와 지시, 인위적 조정 없이도 가격의 신호에 따라 수요량과 공급량, 생산과 소비가 조화를 이루며 자원 배분이 최적화되는 게 시장경제다. 어떤 면에서 시장경제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시장의 자원 배분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를 시장실패라 한다. 정부규제를 논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개념이다.
문제는 불완전과 비효율을 분간하지 않고 시장실패 개념을 오남용하면서 정부규제를 촉구하거나 선호하는 경향이 아주 크다는 것이다. 시장실패가 있다면 다른 쪽에는 정부실패가 있다. 하지만 후자는 고려하지 않은 채 ‘시장실패=정부규제’를 당연시하는 사고가 입법부 행정부 심지어 학계에서도 횡행하고 있다.
시장실패 개념의 오남용이 계속되면 정부는 갈수록 팽창하고 시장은 위축된다. 오남용의 발단은 시장실패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다. 시장실패는 겉보기와 달리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경제학적으로는 어떤 산업에서 공공재, 무임승차, 외부효과, 도덕적 해이 등의 특성이 존재할 때 시장실패의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이 중 공공재는 소비에서의 비(非)배제성과 비경합성을 특징으로 하는 재화 또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전문용어를 설명한다면서 또 다른 전문용어를 들이대니, 여간해서는 공공재와 시장실패 개념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부정확한 이해는 오해로 이어진다. 가장 흔한 경우가 공공재를 정부가 생산 소비 공급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어느 단체에서 중·고교생에게 올바른 경제교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경제교육서를 발간했다. 그런데 여기에서조차 공공재를 ‘정부가 사용하기 위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로 설명하고 있다. 어느 정치학 사전에서는 공공재를 ‘정부의 재정으로 공급된 재화나 서비스’로 풀이하고 있다.
둘 다 비슷한 내용이고, 명백한 오류다. 정부지출 중에 공공재와 관련이 있는 것은 국방, 치안과 같은 일부분에 국한될 뿐이다. 그 밖의 예산은 대부분 경쟁적인 시장에서 지출되며 시장실패나 공공재와는 무관하다.
정부가 생산, 공급하는 것들을 모두 공공재로 보는 것은 정부의 모든 시장개입을 시장실패 문제의 시정을 위한 행위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공공재, 시장실패에 대한 인식 오류는 시장경제에는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 현존하는 규제도 그 내용을 뜯어보면 시장실패와는 무관하게 어떤 사건이나 정치적 계기에서 비롯된 게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제도는 사업자 간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 내용을 담고 있다. 경쟁을 제한하고, 그 결과 소비자 복지를 침해하는 규제가 시장실패 시정 목적에서 나왔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장실패에 대한 환상이 널리 확산되는 이면에는 등대, 꿀벌의 우화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등대 이야기는 이렇다. 등대의 불빛은 주변 선박이 야간에도 안전하게 항해하는 데 아주 긴요하다. 그런데 등대 불빛은 주변의 모든 배가 이용할 수 있고 어느 배가 이용했다 해서 다른 배가 이용하는 불빛의 양이 줄지도 않으며, 또 넓은 바다에서 그 불빛을 이용하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등대는 소비의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이 결합된, 말 그대로 공공재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배 주인은 받는 혜택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급하기보다는 가급적이면 공짜로 이용(무임승차)하려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시장에 맡겨두면 등대가 건설·운영될 수 없고, 정부가 세금으로 등대를 세우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등대 우화의 줄거리다.
등대 우화는 폴 새뮤얼슨의 1970년대 경제학원론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졌다. 재정학에서는 등대 우화에 빗대 시장실패와 공공재를 설명하는 게 정석이 됐을 정도다.
그러나 등대 우화가 상징하는 만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영국의 등대 역사에 관한 논문에서 로널드 코스는 1820년께 영국 등대의 약 4분의 3을 민간이 건설해 운영하고 매매와 상속까지 했다고 밝혔다. 나중에는 트리니트 하우스라는 민간회사가 등대산업 독점권을 취득해 영국 등대의 대부분을 인수해 운영했다. 어찌됐든 영국의 등대 역사는 재산권 설정과 시장거래비용 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민간기업도 얼마든지 공공재를 생산, 공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꿀벌 우화도 비슷하다. 꽃 피는 계절, 과수원 옆에 벌통을 설치하면 과수원 경작자와 양봉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경작자는 원활한 수분을 통해 과일 생산량을 늘릴 수 있고 양봉가는 벌꿀 채취량을 늘릴 수 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만 꿀벌의 수분 활동에 가격을 매겨 거래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장실패가 발생한다는 게 꿀벌 우화의 요지다.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스티븐 청에 의하면 우화의 내용과 달리 경작자와 양봉가는 서로 계약을 체결, 거래를 하고 있으며 계약방식도 일반 임대차 계약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어느 때는 경작자가 수분에 대해 보상하고 또 어느 때는 양봉가가 벌꿀 채취의 대가를 지급한다는 사실이다.
시장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정교하게 작동한다. 그러니 널리 알려진 우화라고 여기에 빗대 시장실패를 함부로 논할 일이 아니다.
불완전함을 없애야한다는 ‘니르바나 성향의 함정’…정부규제 범람 초래
정책을 제언하거나 입안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불완전과 비효율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사실 이 자체만으로 정부규제를 통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목적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실패 가능성이 높은 규제정책이 범람하는데, 해럴드 뎀세츠 교수는 이를 ‘니르바나 성향의 함정’으로 표현했다. 니르바나는 불교의 열반(涅槃)을 의미한다.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살아서는 갈 수 없고, 이 땅에 구현할 수도 없는 이상향이다.
니르바나 성향이란 어떤 이상적인 기준이나 규범을 절대적 기준점으로 삼아 현실의 불완전성을 탓하는 한편, 정부가 개입해서 이를 개선해야 한다며 규제를 촉구하는 성향을 일컫는다. 경제 현실 또는 시장기능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정부가 규제를 해야 한다면 세상에 규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교과서적인 완전경쟁의 잣대로 보면 세상의 모든 시장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완전경쟁은 처음부터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론적 허구, 니르바나기 때문이다.
과잉 규제, 정부실패의 가능성을 줄이려면 먼저 완전성, 니르바나에 대한 강박증부터 떨쳐내야 한다.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이 열려 있을 수 있다. 시장경쟁 또한 불완전하기 때문에 지식의 발견과 혁신이 끊이지 않고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불완전이 반드시 비효율을 의미하지 않음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면 더 나쁜 상태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소비자를 위한다며 보조금 상한을 규제하는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이 그런 경우다. 취지와는 정반대로 시행 뒤 소비자 후생이 이전보다 악화됐다며 비판의 대상이 된 까닭도 불완전과 비효율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입법부와 행정부의 정책 입안자는 물론, 학계의 정책 제언자들은 니르바나 성향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시장경제는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원이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시스템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가격을 의미한다. 가격에는 우리 모두가 의사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집약돼 있다.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면 사려는 사람은 줄고 만들어 팔려는 사람은 늘어난다. 가격이 생각보다 싸면 수요량은 늘고 공급량은 준다.
정부를 포함한 누군가의 강제와 지시, 인위적 조정 없이도 가격의 신호에 따라 수요량과 공급량, 생산과 소비가 조화를 이루며 자원 배분이 최적화되는 게 시장경제다. 어떤 면에서 시장경제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시장의 자원 배분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를 시장실패라 한다. 정부규제를 논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개념이다.
문제는 불완전과 비효율을 분간하지 않고 시장실패 개념을 오남용하면서 정부규제를 촉구하거나 선호하는 경향이 아주 크다는 것이다. 시장실패가 있다면 다른 쪽에는 정부실패가 있다. 하지만 후자는 고려하지 않은 채 ‘시장실패=정부규제’를 당연시하는 사고가 입법부 행정부 심지어 학계에서도 횡행하고 있다.
시장실패 개념의 오남용이 계속되면 정부는 갈수록 팽창하고 시장은 위축된다. 오남용의 발단은 시장실패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된다. 시장실패는 겉보기와 달리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경제학적으로는 어떤 산업에서 공공재, 무임승차, 외부효과, 도덕적 해이 등의 특성이 존재할 때 시장실패의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이 중 공공재는 소비에서의 비(非)배제성과 비경합성을 특징으로 하는 재화 또는 서비스를 의미한다. 전문용어를 설명한다면서 또 다른 전문용어를 들이대니, 여간해서는 공공재와 시장실패 개념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부정확한 이해는 오해로 이어진다. 가장 흔한 경우가 공공재를 정부가 생산 소비 공급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어느 단체에서 중·고교생에게 올바른 경제교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경제교육서를 발간했다. 그런데 여기에서조차 공공재를 ‘정부가 사용하기 위해 생산한 재화와 서비스’로 설명하고 있다. 어느 정치학 사전에서는 공공재를 ‘정부의 재정으로 공급된 재화나 서비스’로 풀이하고 있다.
둘 다 비슷한 내용이고, 명백한 오류다. 정부지출 중에 공공재와 관련이 있는 것은 국방, 치안과 같은 일부분에 국한될 뿐이다. 그 밖의 예산은 대부분 경쟁적인 시장에서 지출되며 시장실패나 공공재와는 무관하다.
정부가 생산, 공급하는 것들을 모두 공공재로 보는 것은 정부의 모든 시장개입을 시장실패 문제의 시정을 위한 행위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공공재, 시장실패에 대한 인식 오류는 시장경제에는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 현존하는 규제도 그 내용을 뜯어보면 시장실패와는 무관하게 어떤 사건이나 정치적 계기에서 비롯된 게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제도는 사업자 간 경쟁을 제한하는 규제 내용을 담고 있다. 경쟁을 제한하고, 그 결과 소비자 복지를 침해하는 규제가 시장실패 시정 목적에서 나왔다고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시장실패에 대한 환상이 널리 확산되는 이면에는 등대, 꿀벌의 우화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등대 이야기는 이렇다. 등대의 불빛은 주변 선박이 야간에도 안전하게 항해하는 데 아주 긴요하다. 그런데 등대 불빛은 주변의 모든 배가 이용할 수 있고 어느 배가 이용했다 해서 다른 배가 이용하는 불빛의 양이 줄지도 않으며, 또 넓은 바다에서 그 불빛을 이용하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등대는 소비의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이 결합된, 말 그대로 공공재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배 주인은 받는 혜택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급하기보다는 가급적이면 공짜로 이용(무임승차)하려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시장에 맡겨두면 등대가 건설·운영될 수 없고, 정부가 세금으로 등대를 세우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 등대 우화의 줄거리다.
등대 우화는 폴 새뮤얼슨의 1970년대 경제학원론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졌다. 재정학에서는 등대 우화에 빗대 시장실패와 공공재를 설명하는 게 정석이 됐을 정도다.
그러나 등대 우화가 상징하는 만큼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영국의 등대 역사에 관한 논문에서 로널드 코스는 1820년께 영국 등대의 약 4분의 3을 민간이 건설해 운영하고 매매와 상속까지 했다고 밝혔다. 나중에는 트리니트 하우스라는 민간회사가 등대산업 독점권을 취득해 영국 등대의 대부분을 인수해 운영했다. 어찌됐든 영국의 등대 역사는 재산권 설정과 시장거래비용 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민간기업도 얼마든지 공공재를 생산, 공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꿀벌 우화도 비슷하다. 꽃 피는 계절, 과수원 옆에 벌통을 설치하면 과수원 경작자와 양봉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 경작자는 원활한 수분을 통해 과일 생산량을 늘릴 수 있고 양봉가는 벌꿀 채취량을 늘릴 수 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만 꿀벌의 수분 활동에 가격을 매겨 거래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장실패가 발생한다는 게 꿀벌 우화의 요지다.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스티븐 청에 의하면 우화의 내용과 달리 경작자와 양봉가는 서로 계약을 체결, 거래를 하고 있으며 계약방식도 일반 임대차 계약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어느 때는 경작자가 수분에 대해 보상하고 또 어느 때는 양봉가가 벌꿀 채취의 대가를 지급한다는 사실이다.
시장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정교하게 작동한다. 그러니 널리 알려진 우화라고 여기에 빗대 시장실패를 함부로 논할 일이 아니다.
불완전함을 없애야한다는 ‘니르바나 성향의 함정’…정부규제 범람 초래
정책을 제언하거나 입안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불완전과 비효율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사실 이 자체만으로 정부규제를 통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목적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실패 가능성이 높은 규제정책이 범람하는데, 해럴드 뎀세츠 교수는 이를 ‘니르바나 성향의 함정’으로 표현했다. 니르바나는 불교의 열반(涅槃)을 의미한다.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살아서는 갈 수 없고, 이 땅에 구현할 수도 없는 이상향이다.
니르바나 성향이란 어떤 이상적인 기준이나 규범을 절대적 기준점으로 삼아 현실의 불완전성을 탓하는 한편, 정부가 개입해서 이를 개선해야 한다며 규제를 촉구하는 성향을 일컫는다. 경제 현실 또는 시장기능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정부가 규제를 해야 한다면 세상에 규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교과서적인 완전경쟁의 잣대로 보면 세상의 모든 시장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완전경쟁은 처음부터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론적 허구, 니르바나기 때문이다.
과잉 규제, 정부실패의 가능성을 줄이려면 먼저 완전성, 니르바나에 대한 강박증부터 떨쳐내야 한다.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이 열려 있을 수 있다. 시장경쟁 또한 불완전하기 때문에 지식의 발견과 혁신이 끊이지 않고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불완전이 반드시 비효율을 의미하지 않음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규제의 칼날을 들이대면 더 나쁜 상태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소비자를 위한다며 보조금 상한을 규제하는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이 그런 경우다. 취지와는 정반대로 시행 뒤 소비자 후생이 이전보다 악화됐다며 비판의 대상이 된 까닭도 불완전과 비효율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입법부와 행정부의 정책 입안자는 물론, 학계의 정책 제언자들은 니르바나 성향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