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시장은 소통부재' 주장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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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을 매개로 하는 脫언어적 소통
이 암묵적 지식이 인류번영 추진력
규제로 억압 말고 경제자유 돋워야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
이 암묵적 지식이 인류번영 추진력
규제로 억압 말고 경제자유 돋워야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
청와대가 최근 들어 귀가 아프도록 듣는 말이 소통 부족이다. 일부는 ‘불통 대통령’이란 말로 박근혜 대통령을 흔들기도 한다. 소통·불통이란 말은 원래 야당과 좌파논객들이 이명박 정부를 흔드는 데 사용했던 말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여야는 물론 우파논객까지도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데 쓰는 일상적 언어가 됐다.
소통 개념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그걸 기초로 해 개발한 게 오늘날 좌파의 대부 위르겐 하버마스의 ‘심의민주주의(審議民主主義·deliberative democracy)’가 아니던가. 김대중 정부 이후 좌파논객·정치인들이 소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건 그래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소통 부재로 사회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기에 그들이 함께 모여 기업, 복지, 고용 등 경제이슈를 심의·숙고해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게 심의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불평등은 심의정치를 해친다는 인식에서 생겨난 게 부자증세, 대기업규제 등 다양한 정부 간섭이다.
시장은 소통 부재라는 주장도 틀렸다. 시장이야말로 거대한 소통체계라는 하이에크의 인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장의 제일 덕목은 자원배분의 효율성이 아니라 지식 소통의 탁월성이다.
시장 거래에서 약속하기 전에는 가격, 품질, 납품조건 등에 관한 대화가 필요하다. 성공적인 사업계획을 위해서 기업가는 소비자들만이 아니라 경쟁 상대방의 생각, 의견, 선호를 심의·고려해야 한다. 그런 소통을 위한 매개물은 언어다. 이는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해 다른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시장만이 고유한 게 아니라 정치 소통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숙고정치엔 존재할 수 없고 시장에만 고유한 소통이 있다. 이게 가격을 매개로 하는 탈(脫)언어적 소통이다. 가격구조는 수백 수천만 명의 의견, 선호, 생각을 통합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가격구조는 그 어떤 두뇌로도 모방이 불가능한 웅장한 소통네트워크다. 흥미로운 건 가격을 통한 소통은 우리의 눈과 귀로는 물론 인지능력으로도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없는 범세계적인 거시 우주로까지 확대 가능하다는 점이다. 정치 소통은 수십 수백 명, 기껏해야 수천 명의 미시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민주정치의 적정 인구는 5만명 정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격을 통한 시장 소통의 또 다른 특징은 암묵적 지식의 소통이다. 그런 지식은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는 표현할 수 있다. 재주, 아이디어, 특정한 재화에 대한 호·불호, 기업가 정신 등에 내장된 지식이 그런 성격이다. 시장은 말이 아닌 행동을 중시하는 이유다
그런 지식들은 경제인들의 구매·판매행위를 거쳐 가격구조에 반영된다. 따라서 가격에 사람들이 적응하는 건 가격에 구현된 타인들의 의견, 선호, 생각 등을 심의하고 학습한다는 걸 의미한다.
명시적 지식만이 참된 것이라는 이유로 암묵적인 것을 무시하는 게 심의민주주의다. 이는 하버마스가 이어받은 데카르트 전통의 합리주의가 아니던가. 그러나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지식의 대부분은 암묵적이라는 현대의 인지심리학과 그런 지식이야말로 문명의 원동력이요, 번영의 추진력이라는 영국의 수학자 화이트헤드의 탁월한 인식을 주지해야 한다.
정치가들이 떼를 지어 전통시장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상인들과 소비자들의 암묵적 지식을 소통할 수 없다. 그런 소통은 시장의 가격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시장의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려면 경제자유가 필연이다. 보편복지, 규제, 정부지출은 경제자유를 억압하고 그래서 시장의 거대한 지식소통체계를 왜곡하고 파괴한다.
따라서 정치권은 청와대의 불통을 탓하지 말고 보편복지, 규제, 정부지출을 줄여 시장 소통을 확대 강화해야 한다. 정치 소통의 강조는 ‘경제의 정치화’를 부를 뿐이다. 소통능력이 탁월했지만 1930년대 규제와 간섭으로 미국 경제를 대공황으로 이끈 인물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니던가.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
소통 개념을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그걸 기초로 해 개발한 게 오늘날 좌파의 대부 위르겐 하버마스의 ‘심의민주주의(審議民主主義·deliberative democracy)’가 아니던가. 김대중 정부 이후 좌파논객·정치인들이 소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건 그래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소통 부재로 사회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기에 그들이 함께 모여 기업, 복지, 고용 등 경제이슈를 심의·숙고해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게 심의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불평등은 심의정치를 해친다는 인식에서 생겨난 게 부자증세, 대기업규제 등 다양한 정부 간섭이다.
시장은 소통 부재라는 주장도 틀렸다. 시장이야말로 거대한 소통체계라는 하이에크의 인식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시장의 제일 덕목은 자원배분의 효율성이 아니라 지식 소통의 탁월성이다.
시장 거래에서 약속하기 전에는 가격, 품질, 납품조건 등에 관한 대화가 필요하다. 성공적인 사업계획을 위해서 기업가는 소비자들만이 아니라 경쟁 상대방의 생각, 의견, 선호를 심의·고려해야 한다. 그런 소통을 위한 매개물은 언어다. 이는 개인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해 다른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은 시장만이 고유한 게 아니라 정치 소통에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숙고정치엔 존재할 수 없고 시장에만 고유한 소통이 있다. 이게 가격을 매개로 하는 탈(脫)언어적 소통이다. 가격구조는 수백 수천만 명의 의견, 선호, 생각을 통합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가격구조는 그 어떤 두뇌로도 모방이 불가능한 웅장한 소통네트워크다. 흥미로운 건 가격을 통한 소통은 우리의 눈과 귀로는 물론 인지능력으로도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없는 범세계적인 거시 우주로까지 확대 가능하다는 점이다. 정치 소통은 수십 수백 명, 기껏해야 수천 명의 미시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민주정치의 적정 인구는 5만명 정도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격을 통한 시장 소통의 또 다른 특징은 암묵적 지식의 소통이다. 그런 지식은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는 표현할 수 있다. 재주, 아이디어, 특정한 재화에 대한 호·불호, 기업가 정신 등에 내장된 지식이 그런 성격이다. 시장은 말이 아닌 행동을 중시하는 이유다
그런 지식들은 경제인들의 구매·판매행위를 거쳐 가격구조에 반영된다. 따라서 가격에 사람들이 적응하는 건 가격에 구현된 타인들의 의견, 선호, 생각 등을 심의하고 학습한다는 걸 의미한다.
명시적 지식만이 참된 것이라는 이유로 암묵적인 것을 무시하는 게 심의민주주의다. 이는 하버마스가 이어받은 데카르트 전통의 합리주의가 아니던가. 그러나 인간행동을 결정하는 지식의 대부분은 암묵적이라는 현대의 인지심리학과 그런 지식이야말로 문명의 원동력이요, 번영의 추진력이라는 영국의 수학자 화이트헤드의 탁월한 인식을 주지해야 한다.
정치가들이 떼를 지어 전통시장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상인들과 소비자들의 암묵적 지식을 소통할 수 없다. 그런 소통은 시장의 가격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시장의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려면 경제자유가 필연이다. 보편복지, 규제, 정부지출은 경제자유를 억압하고 그래서 시장의 거대한 지식소통체계를 왜곡하고 파괴한다.
따라서 정치권은 청와대의 불통을 탓하지 말고 보편복지, 규제, 정부지출을 줄여 시장 소통을 확대 강화해야 한다. 정치 소통의 강조는 ‘경제의 정치화’를 부를 뿐이다. 소통능력이 탁월했지만 1930년대 규제와 간섭으로 미국 경제를 대공황으로 이끈 인물이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니던가.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