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싫어' 日 밀항선 탄 소년, 폐업 직전 파친코에 인생을 걸다…리조트·골프장 '레저왕국' 일궈…재산 순위 12위 巨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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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CEO 마루한 한창우 회장
일본 '파친코의 대부'로
매형이 처분하려던 파친코 물려받아…'잃어버린 20년'에도 이익 매년 늘어
잘하는 일에 집중해라
볼링장 사업으로 확장했다 '빚더미'…채권단 신용만 믿고 지원, 再起 성공
핏줄·민족에 대한 애틋함
韓·日 경제교류 전도사, 소외층 지원…88올림픽땐 정부에 30억 기부금도
일본 '파친코의 대부'로
매형이 처분하려던 파친코 물려받아…'잃어버린 20년'에도 이익 매년 늘어
잘하는 일에 집중해라
볼링장 사업으로 확장했다 '빚더미'…채권단 신용만 믿고 지원, 再起 성공
핏줄·민족에 대한 애틋함
韓·日 경제교류 전도사, 소외층 지원…88올림픽땐 정부에 30억 기부금도
2013년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가 열린 캐나다 온타리오주 버드와이저 가든스 빙상경기장. 김연아 선수의 경기 장면 너머로 ‘마루한’이라고 적혀 있는 한글광고가 눈에 띄었다. 일본 최대 파친코 업체 마루한의 광고다. 이 회사의 창업자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더불어 성공한 재일동포 기업가로 꼽히는 한창우 회장이다. 미 경제 매체 포브스가 추정한 한 회장의 재산은 일본 내 개인 재산 순위 12위에 해당하는 27억달러(약 2조9500억원)에 달한다.
임직원 수가 1만1800여명인 마루한의 지난해 매출은 2조1116억엔(약 19조3000억원)에 달하고 영업이익은 605억엔을 기록했다. 일본 경제를 강타했던 잃어버린 20년 시대에도 마루한은 이익은 매해 늘어났다. 이익과 종업원의 적성,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한 회장의 마루한이즘을 일본 내 경영학계에서 주목하는 이유다.
밀항 소년에서 청년 사업가로
한 회장은 1931년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소작농이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에게 가난은 숙명과도 같았다. 그는 1945년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에 정착한 큰형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한 회장은 “고향의 전경은 그림 같았지만 일자리는 전혀 없었다”며 “우리 집은 가난해서 너는 학교도 못 다닌다는 형의 말에 일본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건너온 한 회장은 1948년 도쿄의 호세이대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전후 혼란기에 더 많은 기회를 잡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외국인이었던 한 회장이 들어갈 수 있던 기업은 마땅치 않았다.
그는 교토에서 파친코 매장을 운영하던 매형을 찾아간다. 한 회장은 최신 설비로 무장한 경쟁 업체에 밀려 매장을 정리하려던 매형을 설득해 매장을 물려받는다. 전후 경제복구 과정에서 파친코 이용자가 늘어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7년 구슬의 동그라미를 뜻하는 ‘마루’와 한 회장의 성이 합쳐져 마루한이 설립됐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경제성장으로 여윳돈이 생기자 사람들은 파친코로 몰려들었다. 마루한의 승률이 높은 파친코 머신이 잘 터진다는 소문이 돌자 손님들은 한 회장의 파친코로 향했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한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볼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67년 효고현에 개장했던 한 회장의 볼링장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고도 성장기에 오른 일본에 레저 스포츠 바람이 불었고 남녀노소 부상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스포츠인 볼링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TV 방송사는 1주일에 10편 이상의 볼링 방송을 내보냈다. 매출은 폭발적으로 늘었고 회사 규모는 10배 넘게 커졌다. 20년 전 맨주먹으로 대한해협을 건너왔던 한 회장이 건실한 청년 사업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업에 실패해도 신용을 잃지 마라
한 회장의 공격적인 투자는 이어졌다. 그는 1972년 시즈오카에 보통 볼링장의 4배 규모에 달하는 120레인이 설치된 볼링장을 세웠다. 하지만 막대한 돈을 끌어들여 진행한 투자로 한 회장은 위기를 맞는다. 일본에 오일쇼크가 덮치자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볼링 붐이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의 매출은 줄어들었고 한 회장의 볼링 사업은 1975년 60억엔(현재 가치로 약 1000억원)의 막대한 빚만 남기고 실패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채권단은 한 회장의 신용을 믿고 그에게 추가적인 자금을 지원한다. 파산으로 빚을 떼이기보단 그의 신용과 사업 수완을 믿어보자는 판단이었다. 한 회장은 “일본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 한국인이었기에 사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신용이 재기를 위한 밑천이 됐다”고 강조했다. 한 회장은 파친코 사업에만 집중한다.
그는 “볼링 사업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은 10가지 일을 평균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한 가지 일을 남보다 10배 잘하는 것이 더 좋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 회장은 볼링장 개설용으로 물색해놓은 목 좋은 지역에 파친코 점포를 열었다. 그는 점포를 계속 늘려갔다. 매달 빚을 갚아 나가는 액수가 많아졌다. 마침 그 무렵 일본 전역에 파친코 붐이 일어 매출이 급신장했다. 60억엔의 빚을 다 갚는 데는 10년이면 충분했다.
한 회장은 장기적으로 마루한을 파친코 사업에 기반을 둔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 레저·리조트 기업으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마루한은 지난해 일본 내 명문 골프클럽인 태평양 골프클럽 등 4개 회사를 계열사로 편입했다. 한 회장은 골프클럽 내에 최고급 리조트를 지을 계획이다.
한국 사랑에도 앞장서
한 회장은 매년 수차례 한국을 찾는다. 고국인 한국과 일본의 경제·문화교류에 기여하고 싶어서다. 그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써달라”며 한국 정부에 30억원을 기부했다. 더불어 한 회장은 도쿄에 설립한 1400억원 규모의 한철문화재단을 통해 한·일 문화 교류와 우호친선, 사회봉사활동 등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고향인 사천시에선 한창우·나카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해 소외 계층 학생들의 학업을 돕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 회장의 노력을 인정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포상했다. 그는 “전 재산을 한·일 양국의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며 “돈은 기술적으로 벌어 예술적으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해외동포들의 경제활동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21세기는 인적 자원이 국력을 결정하는 시대”라며 “전 세계에서 활약하는 750만 한인 동포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임직원 수가 1만1800여명인 마루한의 지난해 매출은 2조1116억엔(약 19조3000억원)에 달하고 영업이익은 605억엔을 기록했다. 일본 경제를 강타했던 잃어버린 20년 시대에도 마루한은 이익은 매해 늘어났다. 이익과 종업원의 적성,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한 회장의 마루한이즘을 일본 내 경영학계에서 주목하는 이유다.
밀항 소년에서 청년 사업가로
한 회장은 1931년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소작농이었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자기 땅이 없는 소작농에게 가난은 숙명과도 같았다. 그는 1945년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일본에 정착한 큰형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한 회장은 “고향의 전경은 그림 같았지만 일자리는 전혀 없었다”며 “우리 집은 가난해서 너는 학교도 못 다닌다는 형의 말에 일본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일본으로 건너온 한 회장은 1948년 도쿄의 호세이대 경제학과에 진학한다. 전후 혼란기에 더 많은 기회를 잡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년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외국인이었던 한 회장이 들어갈 수 있던 기업은 마땅치 않았다.
그는 교토에서 파친코 매장을 운영하던 매형을 찾아간다. 한 회장은 최신 설비로 무장한 경쟁 업체에 밀려 매장을 정리하려던 매형을 설득해 매장을 물려받는다. 전후 경제복구 과정에서 파친코 이용자가 늘어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1957년 구슬의 동그라미를 뜻하는 ‘마루’와 한 회장의 성이 합쳐져 마루한이 설립됐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경제성장으로 여윳돈이 생기자 사람들은 파친코로 몰려들었다. 마루한의 승률이 높은 파친코 머신이 잘 터진다는 소문이 돌자 손님들은 한 회장의 파친코로 향했다. 사업은 번창했지만 한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볼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67년 효고현에 개장했던 한 회장의 볼링장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고도 성장기에 오른 일본에 레저 스포츠 바람이 불었고 남녀노소 부상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스포츠인 볼링의 인기가 치솟은 것이다. TV 방송사는 1주일에 10편 이상의 볼링 방송을 내보냈다. 매출은 폭발적으로 늘었고 회사 규모는 10배 넘게 커졌다. 20년 전 맨주먹으로 대한해협을 건너왔던 한 회장이 건실한 청년 사업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사업에 실패해도 신용을 잃지 마라
한 회장의 공격적인 투자는 이어졌다. 그는 1972년 시즈오카에 보통 볼링장의 4배 규모에 달하는 120레인이 설치된 볼링장을 세웠다. 하지만 막대한 돈을 끌어들여 진행한 투자로 한 회장은 위기를 맞는다. 일본에 오일쇼크가 덮치자 사람들의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볼링 붐이 꺼지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의 매출은 줄어들었고 한 회장의 볼링 사업은 1975년 60억엔(현재 가치로 약 1000억원)의 막대한 빚만 남기고 실패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채권단은 한 회장의 신용을 믿고 그에게 추가적인 자금을 지원한다. 파산으로 빚을 떼이기보단 그의 신용과 사업 수완을 믿어보자는 판단이었다. 한 회장은 “일본사회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 한국인이었기에 사업을 하면서 무엇보다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신용이 재기를 위한 밑천이 됐다”고 강조했다. 한 회장은 파친코 사업에만 집중한다.
그는 “볼링 사업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은 10가지 일을 평균적으로 잘하는 것보다 한 가지 일을 남보다 10배 잘하는 것이 더 좋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한 회장은 볼링장 개설용으로 물색해놓은 목 좋은 지역에 파친코 점포를 열었다. 그는 점포를 계속 늘려갔다. 매달 빚을 갚아 나가는 액수가 많아졌다. 마침 그 무렵 일본 전역에 파친코 붐이 일어 매출이 급신장했다. 60억엔의 빚을 다 갚는 데는 10년이면 충분했다.
한 회장은 장기적으로 마루한을 파친코 사업에 기반을 둔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 레저·리조트 기업으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마루한은 지난해 일본 내 명문 골프클럽인 태평양 골프클럽 등 4개 회사를 계열사로 편입했다. 한 회장은 골프클럽 내에 최고급 리조트를 지을 계획이다.
한국 사랑에도 앞장서
한 회장은 매년 수차례 한국을 찾는다. 고국인 한국과 일본의 경제·문화교류에 기여하고 싶어서다. 그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써달라”며 한국 정부에 30억원을 기부했다. 더불어 한 회장은 도쿄에 설립한 1400억원 규모의 한철문화재단을 통해 한·일 문화 교류와 우호친선, 사회봉사활동 등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고향인 사천시에선 한창우·나카코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해 소외 계층 학생들의 학업을 돕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한 회장의 노력을 인정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포상했다. 그는 “전 재산을 한·일 양국의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며 “돈은 기술적으로 벌어 예술적으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 회장은 해외동포들의 경제활동 지원에도 적극적이다.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21세기는 인적 자원이 국력을 결정하는 시대”라며 “전 세계에서 활약하는 750만 한인 동포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