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간 묵은 갈등, 정부가 수완 발휘해 풀어야죠"
“우리나라 운명에는 천우신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외교의 산증인’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동아시아재단 이사장(사진)의 말이다. 공 전 장관은 최근 ‘나의 외교 노트:안에서 듣고 보고 겪은 한국외교 50년’을 펴냈다. 동국대 한림대 등에서 강의한 내용을 회고록 형식으로 엮은 것이다. 공 전 장관은 “해방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남측 단독정부 수립을 제의한 것은 미국과 소련 회담이 결렬될 것을 일찍 내다본 것”이라며 “미군의 신속한 6·25전쟁 참전은 천우신조였다. 사람들은 보통 미국이 6·25전쟁에 당연히 참전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사실 참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고 했다.

공 전 장관은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해방 전부터 서울로 내려와 자랐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복무하다 1958년 외무부로 자리를 옮겼다. 전쟁 후 외교 요원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군 우수인력을 특채하는 형식이었다. 이후 워싱턴, 도쿄, 캔버라, 카이로 등 재외공관에서 일했다. 주브라질 대사, 뉴욕 총영사, 주일본 대사를 거쳐 제25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했다.

공 전 장관은 일본과 인연이 많은 지일파(知日派) 원로다. 그는 “1964년 아주국(현 동북아국) 출근 첫날 6·3사태가 일어났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주일대사(1993~1994년)로 있을 때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과 군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가 나왔다. 공 전 장관은 한·일 관계의 발전을 위해 위안부 문제는 정치적으로 일단락을 짓는 게 현명하다고 했다.

“한일청구권협정, 그리고 고노 담화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외교적 결론은 났던 겁니다. 정부의 조치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다시 불이 붙었는데, 정부가 정치력을 발휘해 이 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어야 합니다. (한국 측에서) 또 어떤 보상을 요구할지, 문제를 제기할지 가늠을 못하는 일본으로선 더 이상 할 수 있는 제스처가 많지 않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국제적으로 일본도, 한국도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이 힘들다.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포기 못할 것이다. 문제가 더 악화되지 않게 현상 유지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 전 장관은 1978년 베트남에 억류된 한국 외교관 석방을 위한 한국·북한·베트남 3자 비밀 회담 대표로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1983년 중국 민항기 피랍사건 때는 정부 대표로 중국 측과 송환 교섭을 했고, 1992년에는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를 지냈다. 공 전 장관의 ‘나의 외교 노트’는 10·26 사태로 끝을 맺는다. 신군부 등장 이후 외교부 장관 퇴임 때까지의 이야기는 2편을 낼 예정이다. 공 전 장관은 “양측의 상반된 이해관계를 조정해 5 대 5든, 9 대 1이든 서로 챙긴 몫에 만족하도록 ‘윈윈’으로 이끄는 게 외교”라며 “한국은 더 나은 외교력을 발휘해 미국, 일본과 공조체제를 굳건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