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수집상으로 시작…5조원대 자산가로 성장…제지업 한우물 판 '폐지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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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CEO - 장인 주룽제지 회장
편법을 거부한 투명경영
물먹인 폐지 대신 양질의 폐지 수집
품질 인정받으면서 텃세 극복
회장실이 유리로…밀실회의 없애
중국 대표 여성기업인 되다
고성장 바람 타고 제지업 승승장구
13년 만에 생산량 4400% 급증
다각화 대신 핵심분야 집중
포장상자 원료용지 단일품목만 취급
대량생산으로 원가 낮춰 수익 확보
편법을 거부한 투명경영
물먹인 폐지 대신 양질의 폐지 수집
품질 인정받으면서 텃세 극복
회장실이 유리로…밀실회의 없애
중국 대표 여성기업인 되다
고성장 바람 타고 제지업 승승장구
13년 만에 생산량 4400% 급증
다각화 대신 핵심분야 집중
포장상자 원료용지 단일품목만 취급
대량생산으로 원가 낮춰 수익 확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지난 10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부패 방지에 관한 베이징 선언’을 발표했다. 중국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온 정관 유착으로 인한 부패 문제를 바로 잡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전문가들은 공산당의 영향력이 큰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정부와의 ‘관시(關係)’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중국에서 아이디어와 과감한 사업 투자로 손꼽는 사업가로 성장한 사람이 있다. 폐지 수집상으로 사업을 시작해 5조원대 자산가로 성장한 ‘폐지 여왕’ 장인(張茵) 주룽제지 회장이다. 올해 중국의 기업조사기관인 후룬 연구소가 발표한 중국 부호 명단에서 발표한 장 회장의 재산은 290억위안(약 5조2200억원)에 달한다. 중국 여성 기업인 가운데 3위에 해당하는 순위다.
품질 경영으로 대박 행진
장 회장은 1957년 8남매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군인으로 복무하던 부친이 문화대혁명 당시 우파 반동분자로 몰려 투옥되자 섬유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가족들은 전적으로 그가 벌어오는 월급으로 연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은 사치였다. 장 회장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베짜기, 경리 등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고 회상했다.
1985년 선전에 있는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한 제지 회사의 업무를 위탁받아 홍콩을 방문했던 것. 그곳에서 장 회장은 중국 종이시장이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중국은 산림자원 부족과 낙후된 기술로 인해 제지산업 원료 대다수를 수입 폐지와 펄프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 개혁·개방 정책 이후 수출이 급증해 포장용 골판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선진국에서 쓰레기 취급받는 폐지가 중국에선 황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 회장은 바로 전 재산 3만위안(약 500만원)을 들고 홍콩으로 건너간다. 36.3㎡ 남짓한 사무실에서 넝마주이들이 주워온 폐지를 수집해 중국으로 넘겨주고 그 차액을 남기는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기존 업자들은 폐지 전체 무게의 20~30%가량을 물에 젖거나 곰팡이가 잔뜩 끼어 있는 폐지를 넣어 팔고 있었다. 폐지가 무게단위로 팔리기 때문에 물을 먹이면 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 회장은 이런 ‘편법’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폐지 속 수분율을 최고 15%로 낮추고 ‘품질 제일’ 원칙을 고수했다. 장 회장은 폐지를 회수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안면을 익히고 거래를 트면서 기존 기업들의 텃세를 극복했다. 양질의 폐지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장 회장은 미국으로 눈을 돌린다. 작은 섬인 홍콩에서 수거되는 폐지만으론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 폐지 확보에 나선 것이다. 그는 당시 수출품이 든 중국 컨테이너들이 미국에서 화물을 인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빈 배인 점을 이용했다. 현지에서 수집한 폐지를 빈 컨테이너에 실어 물류비를 절감해 낮은 원가로 골판지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립한 폐지 수출 회사 중난(中南)홀딩스는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업계 수위권의 종이 공급상으로 성장했다.
폐지여왕에서 중국 대표 여성 기업인으로
장 회장은 1996년 광둥성 둥관시에 1억1000만달러를 투자해 주룽(玖龍)제지를 설립, 제지사업에 뛰어든다. 중국의 고성장 바람을 타고 제지사업은 계속 확장됐다. 2009년에는 톈진에 네 번째 생산공장을 준공함에 따라 연간 생산 규모는 882만t으로 늘어났다. 20만t으로 제지생산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생산량이 4400%나 급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주룽제지는 아시아 최대 골판지 생산업체이자, 골판지 브랜드로 세계 5위권에 드는 초우량 기업이 됐다.
주룽제지가 2006년 홍콩 증시에 입성하자 투자자들은 몰려들었고 장 회장은 중국 여성 기업인 자산 규모 1위에 오르게 된다. 폐지여왕이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2008년 승승장구하던 장 회장에게 재앙이 찾아왔다. 시장에선 회사의 성장성에 대해 회의론이 부각됐고 무리한 사업 확장을 통한 재무적 부담이 파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해 3월17일 주룽제지 주가는 하루 만에 40.28%나 폭락했다. 장 회장의 주식 평가액은 당일에만 134억4200만홍콩달러(약 1조7000억원)가 사라졌다. 장 회장은 위기에 기민하게 대처해 나갔다. 지출을 삭감하는 자구안을 마련하고 중소기업에 적합한 골판지 등 신제품을 출시해 시장의 우려를 잠재워 갔다. 그가 2009년 2억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자 주가는 반등했다.
투명경영과 사업 집중이 성공의 비결
장 회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로 ‘운(運)’을 꼽는다. 중국의 개혁·개방 시기와 199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 덕에 사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투명경영과 골판지 사업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대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 회장은 주룽제지 상장 당시 “정직하게 일해서 부자가 됐기 때문에 떳떳하다”며 “경험에 비춰볼 때 투명경영이 부자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둥관에 있는 주룽제지의 회장실 사방이 100% 유리로 돼 있는 것 역시 장 회장의 투명경영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사람이 사업에 대해 서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며 “밀실 회의라는 것은 주룽제지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 회장은 무리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 모르는 사업에 진출하기보다는 핵심 분야에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주룽제지가 생산하는 핵심 품목은 포장상자의 원료용지인 골판 원지와 골심지다. 이 두 품목이 주룽제지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7%에 이른다. 단일한 원료용지 품종에 집중함으로써 대량 생산으로 공급 및 생산 원가를 낮추면서 고부가가치 사업체로 키워가고 있다. 그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모두가 중국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왔지만, 나는 홍콩에서부터 줄곧 제지업에만 관심을 쏟았다”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이런 중국에서 아이디어와 과감한 사업 투자로 손꼽는 사업가로 성장한 사람이 있다. 폐지 수집상으로 사업을 시작해 5조원대 자산가로 성장한 ‘폐지 여왕’ 장인(張茵) 주룽제지 회장이다. 올해 중국의 기업조사기관인 후룬 연구소가 발표한 중국 부호 명단에서 발표한 장 회장의 재산은 290억위안(약 5조2200억원)에 달한다. 중국 여성 기업인 가운데 3위에 해당하는 순위다.
품질 경영으로 대박 행진
장 회장은 1957년 8남매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군인으로 복무하던 부친이 문화대혁명 당시 우파 반동분자로 몰려 투옥되자 섬유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가족들은 전적으로 그가 벌어오는 월급으로 연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은 사치였다. 장 회장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베짜기, 경리 등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고 회상했다.
1985년 선전에 있는 무역회사에 근무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한 제지 회사의 업무를 위탁받아 홍콩을 방문했던 것. 그곳에서 장 회장은 중국 종이시장이 만성적인 공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중국은 산림자원 부족과 낙후된 기술로 인해 제지산업 원료 대다수를 수입 폐지와 펄프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 개혁·개방 정책 이후 수출이 급증해 포장용 골판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는 선진국에서 쓰레기 취급받는 폐지가 중국에선 황금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장 회장은 바로 전 재산 3만위안(약 500만원)을 들고 홍콩으로 건너간다. 36.3㎡ 남짓한 사무실에서 넝마주이들이 주워온 폐지를 수집해 중국으로 넘겨주고 그 차액을 남기는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기존 업자들은 폐지 전체 무게의 20~30%가량을 물에 젖거나 곰팡이가 잔뜩 끼어 있는 폐지를 넣어 팔고 있었다. 폐지가 무게단위로 팔리기 때문에 물을 먹이면 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 회장은 이런 ‘편법’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폐지 속 수분율을 최고 15%로 낮추고 ‘품질 제일’ 원칙을 고수했다. 장 회장은 폐지를 회수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안면을 익히고 거래를 트면서 기존 기업들의 텃세를 극복했다. 양질의 폐지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장 회장은 미국으로 눈을 돌린다. 작은 섬인 홍콩에서 수거되는 폐지만으론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 폐지 확보에 나선 것이다. 그는 당시 수출품이 든 중국 컨테이너들이 미국에서 화물을 인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빈 배인 점을 이용했다. 현지에서 수집한 폐지를 빈 컨테이너에 실어 물류비를 절감해 낮은 원가로 골판지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9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립한 폐지 수출 회사 중난(中南)홀딩스는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업계 수위권의 종이 공급상으로 성장했다.
폐지여왕에서 중국 대표 여성 기업인으로
장 회장은 1996년 광둥성 둥관시에 1억1000만달러를 투자해 주룽(玖龍)제지를 설립, 제지사업에 뛰어든다. 중국의 고성장 바람을 타고 제지사업은 계속 확장됐다. 2009년에는 톈진에 네 번째 생산공장을 준공함에 따라 연간 생산 규모는 882만t으로 늘어났다. 20만t으로 제지생산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생산량이 4400%나 급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주룽제지는 아시아 최대 골판지 생산업체이자, 골판지 브랜드로 세계 5위권에 드는 초우량 기업이 됐다.
주룽제지가 2006년 홍콩 증시에 입성하자 투자자들은 몰려들었고 장 회장은 중국 여성 기업인 자산 규모 1위에 오르게 된다. 폐지여왕이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2008년 승승장구하던 장 회장에게 재앙이 찾아왔다. 시장에선 회사의 성장성에 대해 회의론이 부각됐고 무리한 사업 확장을 통한 재무적 부담이 파산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해 3월17일 주룽제지 주가는 하루 만에 40.28%나 폭락했다. 장 회장의 주식 평가액은 당일에만 134억4200만홍콩달러(약 1조7000억원)가 사라졌다. 장 회장은 위기에 기민하게 대처해 나갔다. 지출을 삭감하는 자구안을 마련하고 중소기업에 적합한 골판지 등 신제품을 출시해 시장의 우려를 잠재워 갔다. 그가 2009년 2억달러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자 주가는 반등했다.
투명경영과 사업 집중이 성공의 비결
장 회장은 자신의 성공 비결로 ‘운(運)’을 꼽는다. 중국의 개혁·개방 시기와 199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 덕에 사업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투명경영과 골판지 사업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대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 회장은 주룽제지 상장 당시 “정직하게 일해서 부자가 됐기 때문에 떳떳하다”며 “경험에 비춰볼 때 투명경영이 부자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둥관에 있는 주룽제지의 회장실 사방이 100% 유리로 돼 있는 것 역시 장 회장의 투명경영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그는 “모든 사람이 사업에 대해 서로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며 “밀실 회의라는 것은 주룽제지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장 회장은 무리한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 모르는 사업에 진출하기보다는 핵심 분야에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다. 주룽제지가 생산하는 핵심 품목은 포장상자의 원료용지인 골판 원지와 골심지다. 이 두 품목이 주룽제지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7%에 이른다. 단일한 원료용지 품종에 집중함으로써 대량 생산으로 공급 및 생산 원가를 낮추면서 고부가가치 사업체로 키워가고 있다. 그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모두가 중국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돈을 벌어왔지만, 나는 홍콩에서부터 줄곧 제지업에만 관심을 쏟았다”고 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