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만난 금융계 지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마친 토론회에서 한국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금융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평균 연봉이 제조업보다 훨씬 높은 금융업계에선 왜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나오지 않느냐는 질책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해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798억8000만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도 9월까지 경상수지 흑자는 618억600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550억4000만달러를 넘어섰다. 이대로라면 경상수지 흑자 기록 경신은 올해도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흑자의 대부분은 상품수지 덕이고 서비스수지와 이전소득수지는 여전히 적자 상태다. 작년에도 상품수지 흑자는 805억7000만달러에 달했다.

문제는 이 경상수지 흑자가 내수 위축 탓에 생기는 소위 ‘불황형 흑자’라는 점이다. 경상수지 흑자로 인해, 한국 경제가 일본처럼 고령화와 내수 기반 붕괴로 소위 ‘안전자산의 저주’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골드만삭스의 분석이 생각난다. 달러가 부족해 외환위기라는 수모를 겪은 한국 경제로서는 격세지감이 있지만 베이비 부머들이 소비보다 저축을 늘리고, 안전자산을 찾아 해외 증권 투자를 확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6.1%나 됐는데 금융수지 적자 규모도 GDP의 5.9%에 달한 가운데 한국 투자자들은 해외 증권을 169억5000만달러어치나 샀다. 만일 해외 금융투자의 수익성이 악화되면 내수 부진은 더 심화될 것이다. 확대 해석하자면 불황형 흑자로 인한 저주가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 어려움도 극복해 나갈 길이 없지는 않다. 지난 10일 때마침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것이 그것이다. 그동안 중국 경제의 고성장 과정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었던 만큼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명목상으로도 세계 GDP의 12%를 차지하는 중국과의 경제동맹은 산업별로 명암이 크게 엇갈리지만 한국 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은 경제 규모 확대에 걸맞게 금융에서도 강국임을 내세우며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이 위안화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투자 통화로, 더 나아가 기축통화로 키우려고 하면 금융시장을 자유화하고 자본시장을 개방하는 순서를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2011년 중국은 ‘위안화 적격 외국인투자자(RQFII)’ 제도를 만들어 해외 투자자들이 위안화로 본국 자본시장에 직접 투자할 수 있게 허용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7월 국빈 방한 때 위안화 직접거래와 위안화 청산은행 설립을 약속하고 한국에 8000억위안의 RQFII를 할당했다. 위안화 금융 허브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홍콩과 싱가포르는 물론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에 비해 중국 자본시장에서 한발 더 앞서 갈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한국 제조업체들은 해외 진출을 통한 성장과 경영 리스크 분산으로 지금의 글로벌 기업을 만들어 왔다. 금융회사들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수평적 확장을 지속 성장의 방편으로 모색할 때가 왔다. 산업계, 학계뿐 아니라 정부도 금융산업을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인식하는 금융 허브론을 수없이 제시했다.

지금 추세라면 수년간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 흑자가 지속될 것이고 한국 외환시장에서 위안화의 초과 공급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한·중 FTA 체결을 계기로 국내 시중은행은 무역금융·대출 등 위안화 지급 중개를 확대하면서 새로운 영업 영역을 만들어가야 한다. 나아가 글로벌 은행들과 여타 역외센터와 한국 시장을 연결하면서 영업 기회를 확보할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경상수지 흑자를 이용해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한국이 위안화 국제화 추진 과정을 지렛대로 활용하는 전략을 사용한다면 ‘금융의 삼성전자’도 나올 수 있다.

이인실 <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insill723@sog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