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상 매출 1조원 넘는 기업이 CFO도 없어
눈뜨고 당한 은행…장부 살핀 PEF, 투자 철회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뉴엘 재무제표를 들여다본 PEF 담당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엇보다 매년 매출에 육박하는 기형적인 매출채권을 기반으로 급성장했다는 점이 의심쩍었다. 한 PEF 관계자는 “매출채권을 활용하면 생산자금을 빠르게 조달해 성장할 수 있지만 매출이 1조원에 육박한 뒤에도 이 같은 외상 거래 구조가 지속된 점이 수상했다”며 “주문생산 방식의 제품 경쟁력도 특별할 게 없었고, 심지어 회사에 최고재무책임자(CFO)도 없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박 대표를 직접 만나 보니 이사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고,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투명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모뉴엘은 성장 초기부터 은행권 매출채권 팩토링에 의존해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사모펀드(PEF)를 포함해 자본금 투자를 받은 적도, 회사채를 발행한 적도 없다. 올해 5월 5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CB)를 발행한 것이 전부다.
매출채권 팩토링으로 자금을 조달한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이 방식을 활용하면 제조업체는 총판업체가 실제 제품을 팔기 전에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발빠르게 시장에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뉴엘은 매출에 육박하는 매출채권의 대부분을 유동화해 자금을 마련하는 위태로운 구조를 계속 유지해왔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모뉴엘의 주거래처가 몇 군데로 제한된 상황에서 어느 한 곳에 문제가 터지면 순식간에 신용 위험에 노출되는 위태로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모뉴엘은 매출채권 채무자인 총판업체가 은행에 채무액을 갚지 못하면 대신 변제해야 한다.
모뉴엘은 로봇청소기 등의 제품을 5곳 안팎의 총판업체에만 팔아 매출채권 확인서를 받아왔다. 2008년에는 KT 계열사인 KT ENS와 미국 ASI컴퓨터테크놀러지스 등 총판업체 2곳에 매출(738억원)의 94%를 팔았다. 매출 1조원을 넘어선 지난해에도 KT ENS, ASI 등 2곳을 포함한 4곳에서 매출 89.1%를 소화했다. 올초 사기 대출에 연루됐던 KT ENS는 2007~2013년 모뉴엘의 해외 총판을 맡아 총 2000억원 규모의 홈시어터PC를 팔았다고 설명했다.
감독당국은 모뉴엘이 수출 서류를 조작한 정황에 비춰봤을 때 매출채권 거래에서 ‘카드 돌려막기’ 수법이 동원됐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모뉴엘-은행-총판업체 3각 구도에서 매출채권이 그동안 제대로 돌다 막판에 사고가 터졌을 수 있지만 오래전부터 매출채권 거래가 조작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PEF와 달리 은행권에선 2012년까지 주거래은행을 맡았던 우리은행을 제외하고는 낌새를 채지 못했다. 모뉴엘은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아 제대로 된 신용등급이 없는 데다 은행 내부평가에서도 제외됐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자체 기업 신용위험평가 때 모뉴엘을 세부평가대상에서 제외했다. 장부상 3년 연속 흑자를 냈고 이자보상배율이 1을 넘는다는 이유에서다.
한 PEF 관계자는 “은행이나 무역보험공사가 모뉴엘 감사보고서의 주석사항과 영업활동현금흐름만 제대로 살폈어도 수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어느 곳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조진형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