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자, 이 사진을 보세요. 침수지역에서 주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는 버스 수백 대가 물에 빠진 채 그냥 버려져 있잖아요. 국가와 민간이 갖고 있는 모든 자원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리더십이야말로 대형 재난을 마주한 리더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에요.”

지난 7일 서울 광화문 인근 한식당에서 만난 조 올보 전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 청장(사진)은 서류철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이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는 “2005년 뉴올리언스를 할퀴고 간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사는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모두에 책임이 있다”며 “지방정부가 정치적 고려 때문에 재난지원 요청과 비상사태 선포를 머뭇거리지만 않았다면 2000여명이 숨지는 대형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핵심 참모로 텍사스 정가에서 잔뼈가 굵은 올보 전 청장은 부시 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FEMA 청장으로 임명됐다. 2001년 미국 9·11 테러 사건 당시 구조와 복구 작업을 총지휘했던 올보 전 청장은 2004년 위기관리 전문기업인 ‘올보 인터내셔널 그룹’을 설립해 터키와 카타르 등 각국 정부에 위기관리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위기관리전략연구소(소장 김경해) 초청으로 5일 한국을 찾은 그는 안전행정부와 소방방재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국형 재난 대응 시스템 구축에 대한 조언을 했다.

올보 전 청장은 대형재난 발생 시 현장 책임자가 대통령에게 재난 상황을 신속하게 보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재난이 발생했는데도 관료주의 때문에 대통령이 현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이미 대응은 실패한 것”이라며 “9·11 테러 당시 현장에 나가 전화로 직접 대통령에게 상황을 알렸기 때문에 빠르게 피드백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재난 컨트롤타워로 신설하려고 하는 국가안전처에 대해서는 9·11 테러 이후 만들어진 미국 국토안보부가 겪고 있는 조직 비대화의 폐해를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보 전 청장은 “국토안보부 신설로 백악관 직속 기구인 FEMA도 비밀경호국 해안경비대 관세청 등과 함께 국토안보부 밑으로 들어가게 됐다”며 “그 결과 몇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대통령에게 보고가 들어가게 됐고 재난 대응의 신속성이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신설되는 국가안전처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국무총리 산하가 아닌 대통령 직속의 독립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의 그의 의견이다.

방한 기간 부산시장을 비롯해 부산지방경찰청장, 부산소방재난본부장 등 현장 재난 책임자들을 만난 그는 “현장 구조 능력은 미국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지만 기관 간의 책임과 권한이 명확히 설정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대형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선 정부 위주의 ‘상비군 체계’뿐 아니라 민간이 갖고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예비군 체계’ 마련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보 전 청장은 “미국에서는 재난이 터졌을 때 이재민에게 제공하는 우유와 담요, 텐트부터 대형 중장비, 전문 구조업체까지 모든 필요자원을 미리 민간기업과 계약해 둔다”며 “정부뿐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민간이 보유한 자원을 재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화문광장 인근의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을 본 그는 “재난 현장의 유가족과 국민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야만 구조와 복구 작업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며 “세월호 사건 이후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핵심 참모에서 위기관리 전문가로 변신하게 된 것과 관련,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농장에서 일하며 젖소에서 우유를 짜는 일과 달걀 거두기, 학교 공부 등 많은 일 중에서 우선순위를 정해 하나하나 처리하는 습관을 길렀다”며 “모든 재난과 위기는 그 형태는 달라도 사람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 최선의 대응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