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록이든 개인사적이다. 인식 편향을 벗어날 수 없다. 희미한 기억은 종종 거짓을 만들어낸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독일 차관을 빌렸다는 기억도 그런 종류에 속하지만 이런 오류는 광주건, 5·16이건, 민주화의 기억에서건 결코 피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라쇼몽의 진술들 사이에서 진상을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현장에서 같은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의 기억도 다르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는 위증 무고 사기가 넘쳐난다. 그짓을 잘하면 국회의원도 된다. 국회의원들의 자서전류 출판기념회는 대부분 거짓말 잔치다. 사람들은 구역질을 하면서도 돈 봉투를 내민다.

회고록 분야에서 아마도 최악의 경우라면 춘원 이광수일지도 모르겠다. 춘원은 친일의 기억을 애써 감추려는 듯 잘 알려진 저명한 독립투사의 회고록을 썼다. 유려한 문체의 백범일지는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유명 소설가에게 제안이 먼저 갔지만 우여곡절 끝에 춘원에게 일감이 돌아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또 하나의 오발탄이 되고 말았다는 점을 춘원에게 말해주고 싶다. 뒤틀린 시대를 살아내기란 그렇게 어렵다.

누구나 회고록을 쓴다. YS 회고록은 직설적인 표현들이 많아 이회창 김대중 등 많은 경쟁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겼다. 전두환도 노태우도 신정아도 르윈스키도 회고록을 썼다. 그러나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의 회고록은 박정희 개발연대를 추적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다. 오원철 수석의 회고록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남덕우 부총리의 《경제개발의 길목에서》를 읽지 않았다면 한국의 경제개발을 논할 수 없고 강만수의 《현장에서 본 한국 경제》는 개인 회고록이면서 동시에 70년대 이후 90년대까지의 경제정책사다. 자료가 방대하고 구체적이어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기록의 미학이다.

레이건도 썼고 고르바초프도 썼다. 리콴유도 《일류 국가의 길》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발표했다. 자신이 집권했던 50년대에는 싱가포르 여대생들이 필리핀에 식모살이를 갔지만 지금은 필리핀에서 싱가포르에 식모들이 들어온다는 자부심에 가득찬 바로 그 회고록 말이다. 처칠의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은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옛 소련 외무장관 그로미코는 회고록에서 “(외교관들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협상 상대에게 은밀히 정보를 흘리는 역공작도 감행한다”고 폭로했다. 전문 외교관이라면 그로미코를 읽어야 한다.

오늘 신장섭 교수가 집필한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가 공식 출시된다. 다급했던 춘원이 아니더라도 집필자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안철수 생각》의 저자처럼 펜대는 종종 화자에게 포획당할 위험성이 크다. 그런 면에서는 거인을 상대하는 신 교수를 우선 위로해야 한다. 이 책은 많은 구체적 사실들은 생략한 채 분노와 주장과 때늦은 반발을 쏟아내고 있다. 숫자가 넘치지만 반대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예민한 부분에 대해 김 전 회장은 여전히 말끝을 흐린다. 고의가 아니라면 기억의 편향성이다. 그리고 김 전 회장의 경영철학은 놀랍게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헌재 회고록 《위기를 쏘다》가 김우중의 반격을 불렀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에 반발할 김우중은 아니다. 한때는 ‘대우스탄’의 제왕이었던 그다. 이헌재는 놀랍게도 “빅딜을 거부하는 LG반도체의 돈줄을 조았다”는 식의 기억들을 토해 놓았다. 죽이는 측은 완장 증후군일지 몰라도 죽임을 당하는 측의 비명소리는 어떻게 들어야 하나. 지금의 이헌재라면 ‘아뿔싸!’를 연발할 것이다. 기업구조조정은 언제나 뜨거운 논쟁거리다.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 합리적 인간과 합목적형 인간은 너무도 달라서 결코 화해할 수 없다. 한쪽은 교수나 관료가 되고 다른 쪽은 정치가 혹은 기업가가 된다. 그 점은 우리가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을 때 기억해야 한다. 그 책이 지금 막 배달되어 왔다. (대우패망비사2는 ‘누구 말이 맞나’로 이어진다)

정규재 논설위원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