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2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인전을 여는 정 화백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투명한 수채화야말로 바로 ‘회화의 참맛’이다”고 말했다. 조선대 교육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서울과 광주에서 줄곧 활동을 벌여온 그는 수채화가 투명하고 맑으며 가볍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수용성 물감과 목화솜으로 만든 종이, 뭉툭한 붓을 사용해 새로운 수채화의 세계를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맑고 산뜻한 색감에 의존해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는 전통 수채화와는 거리가 멀다.
“물에 적신 종이를 붓으로 두드려 물감이 깊이 배어들어 종이와 하나가 되도록 하는 표현기법으로 재료의 한계를 극복해 냈죠. 사물의 외형적 묘사보다는 대상에서 직관으로 얻어지는 기운생동한 심상의 세계를 감성적인 색채로 재창조한 겁니다.”
정 화백은 ‘아름다운 색채언어로 노래하는 서정시’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 유럽과 미국 등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채집한 야생화를 반추상 기법으로 작업한 ‘판타지아’ 시리즈 30여점을 내보인다.
화려한 실루엣으로 처리된 ‘판타지아’ 시리즈는 팬지를 비롯해 양귀비, 민들레, 패츠니아 등 다양한 야생화를 물감의 번짐과 중첩 속에 꽃의 형태가 드러나도록 한 작품이다.
한때 꽃정물화를 주로 그린 정 화백은 2002년부터 ‘판타지아’ 시리즈에 몰두해왔다고 한다.
“2000년대 초 터키 수도 앙카라를 여행했을 때 케말파샤 광장 주변에 피어난 야생화를 보고 ‘바로 이거다’ 생각했죠. 그곳에서 지상 천국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정 화백은 그 후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러시아, 불가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하며 야생화 풍광을 찾아 나섰다. 지난 5월에는 발틱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야생화 단지를 여행했다.
최근 아크릴 재료도 활용한다는 그는 소재와 대상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고 자연, 인간, 그리고 삶의 자취에 두루 관심을 쏟는다. “외국에서 서식하는 야생화를 일단 카메라로 찍은 뒤 서울에 돌아와 사생과 재구성을 통해 그림을 완성합니다. 끊임없는 리얼리즘의 내면화 작업이라 할 수 있죠.”
커다란 화폭에 클로즈업된 다양한 들꽃은 동양의 수묵정신에 바탕을 둔 한국성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이 자연스러운 ‘무심(無心)의 공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수채화 작업 과정 자체를 힐링, 평화, 행복으로 승화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아닐까. (02)734-0458
김경갑 기자 kkk10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