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출퇴근족의 애환
천안 사는 이 과장, 저녁 회식자리는 '공식 열외'…"술자리 스트레스는 없어요"
'새나라의 어른', 회사가 강북서 판교로 이사…"술·운동·학원 다 포기했죠"
한 중소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정 대리는 요즘 기상시간이 빨라졌다. 한 달 전만 해도 오전 7시에 일어나면 느긋했는데 이제는 5시에 일어나도 빠듯하다. 한 달 전 직장 본사가 서울 강북에서 경기 판교로 이전하면서 출퇴근 시간이 2시간30분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정 대리는 이른 출근 때문에 저녁 술 약속이나 헬스클럽 운동, 어학원 등록도 모두 포기했다.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니 일상생활이 모두 바뀌었어요. 귀가 후 먹는 저녁 식사가 늦어지니 살은 찌고, 버스에서 오랫동안 서 있으니 종아리는 붓고….”
정 대리 같은 ‘장거리 출퇴근족(族)’은 이제 남의 얘기가 아니다. 서울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면서 신도시에 둥지를 트는 젊은 직장인이 늘고 있다. 출퇴근에 하루 두세 시간을 쓰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장거리 출퇴근족에 애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 인근에 사는 직장인들이 모르는 즐거움도 있다. 장기 출퇴근족의 사연과 애환을 들어 보았다.
◆“회식 붙잡으려면 택시비라도 주세요”
최근 회사를 옮긴 ‘인천 시민’ 강 대리는 새 직장에 대체로 만족하지만 딱 하나가 불만이다. 회사 내 분위기가 끈끈해 회식이 일단 시작되면 새벽 1~2시를 넘기는 게 다반사다. “인천 가는 광역버스가 끊길 시간”이라며 일어나고 싶지만 분위기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회식이 끝나면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승차 거부하는 택시가 많다. 겨우 택시를 잡으면 본격적인 공포가 시작된다. 미터기는 빛의 속도로 올라가고 인천 집 앞에 도착하면 요금은 4만원을 훌쩍 넘는다. “택시비로만 한 달에 20만원 넘게 나가요. 이런 식으로 2~3년 근무하다간 경차 한 대 값은 족히 나갈 텐데…. 회식하려면 어려운 가정형편 생각해서 택시비라도 좀 쥐여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침 잠이 워낙 많아 학창시절 지각을 밥 먹듯 했던 이 과장은 지난해 삼성전자에 입사하면서 개과천선했다. 경기 수원으로 향하는 통근버스를 아침 6시에 타려면 5시에는 일어나야 해서다. 통근버스를 놓치는 순간 삼성맨의 출근길은 고난길이 된다.
“그렇게 좋아하던 밤 11시 TV 예능 프로그램은 다 포기했어요. 스마트폰 알람 외에도 자명종을 두 개씩 더 켜 둬요. 야근하고 늦게 자는 날엔 시골에 있는 부모님한테 모닝콜도 부탁하고요.” 이 과장은 어느 정도 적응됐지만 매일 이 같은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천안 사는 이 과장은 회식 열외~~
집이 아예 ‘극단적으로’ 멀면 이런 어려움을 면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일하는 또 다른 이 과장의 집은 충남 천안이다. 천안에 사는 남편과 결혼한 뒤 매일 KTX를 타고 출퇴근하는 생활을 2년째 하고 있다. 이 과장은 저녁 회식에서 ‘공식 열외’다.
“‘집이 천안인데…’라고 하면 ‘그래도 한 잔 더 하자’고 권하는 사람은 없어요. 매일 두세 시간을 기차에서 보내는 게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술자리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큰 장점이죠.”
◆출퇴근길에 피앙세를 만나다
장거리 출퇴근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로맨스도 생긴다. “나는 매일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그녈 보곤 해~♪” 1990년대 유행했던 ‘버스 안에서’라는 노래의 가사 같은 경우다. 대부분은 서로 알아도 모르는 척 스쳐 가지만 인연을 꽉 잡는 ‘능력자’도 있다.
광화문의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 과장이 그런 경우다. 신입사원 때부터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매일 한 시간 넘게 출근하던 김 과장은 언젠가부터 아침마다 같은 역에서 내려 같은 방향으로 걷던 긴 생머리의 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니 같은 건물에 입주한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여직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녀는 “저…. 매일 저랑 같은 지하철 타는 거 아세요?”라며 용감하게 말을 건 그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고, 두 사람은 지금 부부다. “늘 지루했던 출근길에서 인생 최고의 선물을 얻었죠. 신혼집을 얻은 뒤에도 저는 장거리 출퇴근 중이지만, 전혀 불만이 없답니다. 움하하!”
◆버스 첫차에서 인생을 배운다
매일 ‘빨간 버스’ 첫차를 타고 서울에서 경기 용인까지 장거리 출근을 하는 한 대리는 “출근 버스에서 인생을 배운다”고 했다. 동도 트기 전에 출발하는 버스 첫차는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인간군상의 집합소’라는 것. 간혹 밤새 술에 떡이 된 채(?) 널브러진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승객에게서는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게 한 대리 설명이다.
“일찍 출근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요. 저보다 어린 학생부터 아버지, 어머니뻘 되는 분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 이른 시간에 하루를 시작해요. 첫차를 이용하다 보면 세상 사람들이 부지런하고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됩니다.”
임현우/안정락/김은정/김동현/추가영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