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시복식과 시성식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1759~1791)는 전라도 진산(현재 충남 금산·논산)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20대에 고종사촌 정약용을 통해 천주교를 접했고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뒤 어머니와 아우, 이종사촌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다.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며 어머니 장례까지 천주교식으로 치르다 32세 때 참수됐다.

그는 오는 16일 시복식(諡福式)에서 복자로 추대되는 124위의 대표 순교자다. 시복식은 가톨릭에서 성덕이 높은 이를 엄격한 심사 끝에 성인(聖人)의 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추대하는 의식을 말한다. 일정한 유예기간을 거쳐 생애와 저술 등의 검토, 의학적 판단까지 포함한 심사를 통해 교황이 최종 승인한다. 이들 복자를 다시 성인으로 추대하는 의식이 시성식(諡聖式)이다.

복자 심사는 ‘악마의 변호인제도’로 불릴 만큼 혹독하다. 지역교회 준비 작업 10년에 교황청 심사 10년이 더해져 20년 이상 걸린다. 그러나 이번 124명의 교황청 심사는 5년 만에 끝났다. 모두가 순교했으니 더 따질 것도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식 직전에 한국 최대 순교성지인 서소문공원을 일부러 방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식 때 추대한 성인 103명 중 44명도 이곳에서 처형됐다.

이번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 역사상 세 번째다. 1925년(79위)과 1968년(24위)엔 바티칸에서 열렸다. 올해처럼 교황이 바티칸 이외 지역에서 집전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15일 대전에서 여는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도 주목된다. 대축일(大祝日)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로 그리스도 교회 전례력(典禮曆) 중 등급이 가장 높은 축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몇십년간 사제 없이 자생했고 1830년대 프랑스 선교사들이 왔을 때 이미 한글 성경이 있을 정도로 독실했다. 1만여명이 순교하는 박해 속에서 복음화를 이룬 것도 특별하다. 취임 후 외국 방문으로는 세 번째,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한국을 택한 게 다 이런 연유다.

시복식 장소인 광화문이 조선시대 의금부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과 가깝다는 점도 의미 있다. 1784년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 베드로가 첫 세례를 베푼 지 230년. 어느새 한국 가톨릭 신자는 540여만명으로 늘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