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호남고속철도 입찰에서 담합했다는 이유로 28개 건설사에 사상 최대인 435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한다. 건설업계의 올해 과징금만도 1조원이 넘을 전망이다. 부당이익을 챙기는 담합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4대강 담합 논란처럼 건설사들도 억울해 할 여지가 적지 않다. 호남고속철 17개 공구 중 13개 공구는 1사 1공구만 가능하고, 그런 시공능력을 갖춘 건설사 숫자도 제한적이다. 따라서 국책사업은 발주단계부터 나눠 맡게끔 정부가 구조를 만들어 놓고 있는 셈이다.

이뿐이 아니다. 주무부처의 행정지도를 따랐다가 공정위의 담합 판정을 받아 수십억, 수백억원씩 과징금을 무는 경우는 거의 전 업종을 망라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의 보험료 통제를 받는 보험업계는 해마다 한 건 이상 과징금이 부과돼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주류업체들은 국세청 승인을 받는 소주가격을 담합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렀다. 올초 문체부의 행정지도에 따라 출판·서점계가 초등학생 참고서 가격인하를 추진했지만, 소비자에게 이익을 줘도 담합이라는 공정위 유권해석에 막혔다. 심지어 빵집 프랜차이즈들이 8년간 할인율을 담합했다는 것도 실은 동네빵집 살리자고 합의해준 것이고 공정위도 잘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엊그제 TV 폭로랍시고 KBS에 등장했다. 애꿎은 기업들만 범죄자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규제 천국인 국내에서 주무부처의 지시를 거부할 업자는 없다. 법보다 더 무서운 게 행정지도, 권고, 지침 등 보이지 않는 규제들이다. 더구나 이런 규제는 대개 문서가 남지 않아 법원에 가더라도 업자들만 덤터기를 쓰게 된다. 기업들로선 이런 새우등 처지, 샌드위치 신세도 없다. 행정지도가 문제라면 공정위는 업계를 손보기에 앞서 주무부처부터 처벌해야 한다. 기업들엔 주무부처도 정부, 공정위도 정부다. 한쪽은 담합을 독려하고 다른 쪽은 과징금 폭탄을 때려댄다. 박근혜 대통령이 앞에서 규제 혁파를 외치면 기업들은 돌아서서 오히려 짜증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