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이 미래다] 퇴직연금 '규제의 덫'…자산 76% 단기 예금·보험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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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사적연금 활성화로 노후 빈곤 막자 (2)
주식·펀드 투자 제한…추가수익 기회 원천봉쇄
年3%안팎 이자상품 올인
운용규제 없는 호주, 2013년 17% 넘는 수익 올려
주식·펀드 투자 제한…추가수익 기회 원천봉쇄
年3%안팎 이자상품 올인
운용규제 없는 호주, 2013년 17% 넘는 수익 올려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가입자인 정민정 씨(33)는 24일 투자상품을 바꾸려고 연금 담당자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렸다. 정씨는 “주식 비중을 좀 높이려고 했는데 법에 의해 못한다고 한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에 따르면 DC형 가입자는 연금 자산을 주식에 직접 투자할 수 없다. 전문가들이 대신 운용해주는 주식형 펀드의 비중도 40%를 넘어선 안 된다. 운용수익에 대한 책임을 기업이 지는 확정급여(DB)형이라도 위험 자산을 70% 초과해 투자할 수 없게 돼 있다. 시중금리가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 같은 이중 삼중의 ‘족쇄’가 퇴직연금 가입자의 선택권을 막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금·보험으로만 굴리는 연금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퇴직연금 적립액(85조2837억원) 중 92.6%가 예금이나 저축성보험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치우쳐 있다. 원리금보장형 가운데 81.9%는 만기 1년 이하 단기 상품이었다. 전체 퇴직연금 자산의 75.8%가 연 3% 안팎에 불과한 저리형 상품에 묶여 있다는 계산이다.
손성동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상무는 “퇴직연금이 노후 생활의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서 안정성이 중요하지만 요즘 같은 저금리 환경에선 실적배당형 상품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정부가 퇴직연금 투자를 지나치게 규제해 무조건 안전하게 굴려야 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다”며 “해외처럼 투자 규제를 아예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래에셋증권이 작년 자사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위험 자산을 추가 편입하고 싶지만 관련 규제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 비중이 40%에 달했다.
○해외에선 운용 규제 거의 없어
자산배분펀드, 롱쇼트(주가가 오를 것 같은 종목의 현물을 사고, 떨어질 것 같은 종목을 공매도해 안정적 수익 추구)펀드 등 변동성이 작은 간접상품 역시 주식형 펀드와 똑같은 규제를 받는 탓에 다양한 연금 상품을 내놓기 어렵다는 게 금융사들의 얘기다.
최형준 한국투자증권 퇴직연금 운영부장은 “손실 위험이 크지 않은 부동산펀드나 파생금융상품, 실물펀드 등에도 투자 금지 규제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와 달리 호주 영국 미국 등 연금 선진국에선 DB형이든 DC형이든 운용 규제가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운용 규제를 풀기에 앞서 퇴직연금 가입자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고령화연구실장은 “규제 완화가 옳은 방향이지만 한꺼번에 풀면 금융사들이 수수료를 더 받으려고 위험 자산 투자를 경쟁적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며 “금융사에 대한 책임을 더욱 강화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금형 도입해야 수익률 경쟁”
전문가들은 과도한 원리금보장형 비중을 낮추려면 투자 규제 완화와 함께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기금형 제도는 퇴직연금 가입 기업이 독립적인 성격의 연금위원회를 설립한 뒤 다양한 외부 운용기금 중 한 곳을 선택해 맡기는 방식이다. 외부 기금 간 수익률 경쟁을 유도할 수 있고 책임 소재를 가리기도 쉽다. 지금은 각 기업이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금융 수탁사를 선정해 일괄적으로 맡기는 ‘계약형’ 제도만 도입돼 있다.
길재욱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계약형 제도는 은행 보험사 등 퇴직연금 수탁회사가 관계사 상품을 집중 편입하는 한편 원금 손실을 막으려고 안전 자산 위주로만 굴리는 문제가 있다”며 “기금형 제도가 필요하지만 현재 퇴직연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존 금융사들의 반발을 어떻게 무마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기금형 제도를 당장 도입하기 어렵다면 각 기업마다 퇴직연금 투자원칙보고서(IPS)를 작성하도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IPS는 퇴직연금 적립금의 자산 배분과 목표 수익률, 투자결정 과정 등을 담은 보고서다. 신성환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복잡한 상품을 늘어놓고 가입자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결국 금융회사가 원하는 대로 원리금보장형에만 쏠리게 된다”며 “국민연금이 주식투자 비중을 35%까지 늘리면서 매년 추가 수익을 얻고 있는 것도 엄격한 IPS 작성과 이를 위한 기금운용위원회의 공식적 의사결정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상미/허란 기자 saramin@hankyung.com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퇴직연금 적립액(85조2837억원) 중 92.6%가 예금이나 저축성보험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치우쳐 있다. 원리금보장형 가운데 81.9%는 만기 1년 이하 단기 상품이었다. 전체 퇴직연금 자산의 75.8%가 연 3% 안팎에 불과한 저리형 상품에 묶여 있다는 계산이다.
손성동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상무는 “퇴직연금이 노후 생활의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서 안정성이 중요하지만 요즘 같은 저금리 환경에선 실적배당형 상품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정부가 퇴직연금 투자를 지나치게 규제해 무조건 안전하게 굴려야 한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고 있다”며 “해외처럼 투자 규제를 아예 없애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래에셋증권이 작년 자사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위험 자산을 추가 편입하고 싶지만 관련 규제 때문에 실행하지 못한 비중이 40%에 달했다.
○해외에선 운용 규제 거의 없어
자산배분펀드, 롱쇼트(주가가 오를 것 같은 종목의 현물을 사고, 떨어질 것 같은 종목을 공매도해 안정적 수익 추구)펀드 등 변동성이 작은 간접상품 역시 주식형 펀드와 똑같은 규제를 받는 탓에 다양한 연금 상품을 내놓기 어렵다는 게 금융사들의 얘기다.
최형준 한국투자증권 퇴직연금 운영부장은 “손실 위험이 크지 않은 부동산펀드나 파생금융상품, 실물펀드 등에도 투자 금지 규제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와 달리 호주 영국 미국 등 연금 선진국에선 DB형이든 DC형이든 운용 규제가 거의 없다.
일각에서는 운용 규제를 풀기에 앞서 퇴직연금 가입자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류건식 보험연구원 고령화연구실장은 “규제 완화가 옳은 방향이지만 한꺼번에 풀면 금융사들이 수수료를 더 받으려고 위험 자산 투자를 경쟁적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며 “금융사에 대한 책임을 더욱 강화하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금형 도입해야 수익률 경쟁”
전문가들은 과도한 원리금보장형 비중을 낮추려면 투자 규제 완화와 함께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기금형 제도는 퇴직연금 가입 기업이 독립적인 성격의 연금위원회를 설립한 뒤 다양한 외부 운용기금 중 한 곳을 선택해 맡기는 방식이다. 외부 기금 간 수익률 경쟁을 유도할 수 있고 책임 소재를 가리기도 쉽다. 지금은 각 기업이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금융 수탁사를 선정해 일괄적으로 맡기는 ‘계약형’ 제도만 도입돼 있다.
길재욱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계약형 제도는 은행 보험사 등 퇴직연금 수탁회사가 관계사 상품을 집중 편입하는 한편 원금 손실을 막으려고 안전 자산 위주로만 굴리는 문제가 있다”며 “기금형 제도가 필요하지만 현재 퇴직연금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기존 금융사들의 반발을 어떻게 무마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기금형 제도를 당장 도입하기 어렵다면 각 기업마다 퇴직연금 투자원칙보고서(IPS)를 작성하도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IPS는 퇴직연금 적립금의 자산 배분과 목표 수익률, 투자결정 과정 등을 담은 보고서다. 신성환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복잡한 상품을 늘어놓고 가입자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결국 금융회사가 원하는 대로 원리금보장형에만 쏠리게 된다”며 “국민연금이 주식투자 비중을 35%까지 늘리면서 매년 추가 수익을 얻고 있는 것도 엄격한 IPS 작성과 이를 위한 기금운용위원회의 공식적 의사결정 과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상미/허란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