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계시록의 천사’(1803년께).
스티브 잡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는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계시록의 천사’(1803년께).
2007년 7월21일자 뉴욕 타임스에는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잡스가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블레이크의 시집을 읽으며 위안을 얻고 영감을 얻는다는 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간 후 블레이크는 잡스 얘기 때마다 단골 메뉴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글들은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천재성과 독특한 작품세계가 그의 영감을 자극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대부분이고 잡스가 어째서 블레이크에게 매료됐는가는 불분명해 아쉬움을 남겼다. 과학과 인문학, 과학과 예술의 통합을 지향한 잡스와 애플의 비전을 이해하기 위해 블레이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잡스의 성장과정을 보면 블레이크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양말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블레이크는 어린 시절부터 아주 특별한 아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초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에게 현실과 영적인 세계는 하나로 통합돼 비쳤다. 네 살 때는 창밖에서 집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신의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또 아이는 개성이 너무 강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부모는 집에서 교육을 시켰는데 블레이크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부분의 책만 광적으로 파고드는 외골수였다.

그는 성경, 그리스 신화, 북구의 신화 등 학습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해나갔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전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종전의 교리해석에 반대하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는 ‘영원한 복음’에서 예수를 현인이나 전통적인 의미의 구세주가 아니라 도그마, 논리, 심지어 죽음을 초월한 엄청난 창조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한다. 심지어 신성은 인간성 내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천국과 지옥의 결혼’). 사탄도 인간 내면의 사악한 측면에 불과할 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과격한 생각은 계층 간, 남녀 간 평등주의로 발전됐고 시와 그림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됐다. 블레이크 시대만 해도 시는 운율을 중시하는 음악적 성격이 강한 장르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시각, 청각, 문자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블레이크에게 있어 이것들은 모두 하나였고 그저 표현 방식의 차이였을 뿐이다.

고교 중퇴 학력의 엔지니어 가정에 입양된 잡스 역시 초등학교 4학년 때 고교 2년의 수학능력을 지녔던 특별한 아이였다. 하지만 선생님들도 통제할 수 없는 고집불통에 말썽꾸러기였다. 그는 장난도 자기가 좋아하는 전자공학 기술을 가지고 칠 정도였다. 도청장치를 만들어 부모 침실의 대화를 엿듣는 식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구축하는 태도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과학과 대비되는 문학과 음악에도 흥미를 보여 통합적 인식을 만들어나간다.

리드대학 시절 그는 장발을 한 채 맨발로 다니고 마약에도 손을 대는 히피의 전형이었다. 규격에 얽매인 대학 교육에도 회의감을 느껴 구미에 당기는 과목만 편식했다. 이때 접한 서법(calligraphy) 수업은 나중에 컴퓨터 개발 때 서체와 디자인에 대한 집착으로 발전한다. 선불교에 빠져든 것도 이때였다. 서구의 분석적 지식보다 본질적이고 통합적 지식이 그를 잡아당겼다. 본질은 단순함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은 그가 단순한 기능을 추구한 애플의 모토와도 일치한다. 그렇게 그는 기성의 세계관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해나갔다.

블레이크 가 세상을 바꾸는 수단으로 시와 회화를 선택했다면 잡스는 컴퓨터를 선택했다. 자신만의 영감의 원천을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수단 말이다. 그 핵심은 결국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본질은 단순하고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잡스에게 그것은 단순한 제품 디자인과 조작의 편리성, 그리고 다양한 기능의 통합으로 압축된다. 아이팟과 아이폰의 성공은 그런 꿈의 실현이다.

블레이크가 일찍이 말했다. “인류는 원래 하나의 언어,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고. 마찬가지로 애플과 잡스가 구현한 애플 생태계는 정보기술(IT)을 통해 지구촌을 하나의 컴퓨터 언어로 통합했고, “꿈은 반드시 실현될 수 있다”는 하나의 믿음으로 묶어줬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