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인 영양공급소 '마(馬)장동'서 왜 소(牛)를 잡나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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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Margaret Mead 1901~1978]는 20세기 초 우리 조상들을 “쇠고기 맛을 세분해 내는 고도의 미각문화를 지닌 민족”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푸줏간 사람들이 이른바 '신의 손놀림'으로 '일두백미 一頭百味' (소 1마리에서 나오는 100가지 맛)를 창조하는 모습에서 근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래 전 외국인의 눈에 이처럼 신비롭게 비친 기술이 전승된 서울의 대표적인 장소 '마장동 푸줏간'이 베일을 확 벗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이 6월 28일부터 9월 14일까지 개최하는 기획전시회 ‘서울의 푸줏간’을 통해서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마장축산물시장의 발골 및 정형사들은 소, 돼지를 분해해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만들기 위해 10년 가까운 ‘수련’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획득된 이들의 손놀림은 순식간에 소 1마리를 10개 부위로 대분할하고 39개의 부분육으로 소분할한 뒤 100여 가지의 판매부위로 정확하게 나눕니다. 또 돼지 1마리는 7개의 큰 부위로 대분할된 뒤 22개 부분육으로 소분할되고요.
마장축산물시장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이른바 '백정들이 하는 미천한 일'이라며 그동안 외부에 노출하는 것을 극히 꺼렸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측은 이들이 서울 시민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체형과 체급이 각기 다른 소, 돼지를 정확한 부위로 나누는 작업의 전과정'을 영상으로 최초로 공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서울의 푸줏간' 주제의 기획전은 서울시 최초로 가축시장과 도축장, 축산물시장이 한 곳에 설치된 마장동을 전면적으로 조명하는 게 특징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도심 부적격시설로 지목되면서도 수도권 육류의 70%를 공급하며 흔히 '서울시민의 영양분 공급소'로 불리는 마장축산물시장이 언제, 왜 하필 이 곳에 반세기 넘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전시회를 미리 둘러봤습니다.
♣살곶이목장과 간송 전형필의 땅에 농사짓던 '마장동 김씨네'=마장동 馬場洞은 조선시대 왕실 및 관청의 말을 기르던 '살곶이목장 箭串場'의 수말을 기르던 지역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살곶이목장은 말의 사육 및 궁중의 목장, 왕의 가마를 관장하던 사복시 司僕寺 소속의 양마장 養馬場 이지요. 때문에 마장동은 왕이 말을 지켜보았던 '화양정 華陽亭' 말먹이를 키우던 '장안평 長安坪' 암말을 기르던 ‘자양동 紫陽洞’과 함께 현재까지 관련 지명이 남은 곳으로 불립니다.
마장축산물시장이 들어서기 전 마장동은 미나리 무 배추밭이 즐비한 농촌마을. 이번 전시회에서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의 땅에 농사를 지었던 마장동 토박이 '김영진씨 일가'의 80년여 생활상을 통해 이 곳 사람들의 '아픈' 과거를 되돌아 봅니다.
김영진이 간송 전형필의 땅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지급했던 영수증, 김영진씨네 2대인 김용록이 중일전쟁에 참전하고 대가로 받은 채권이 한일협정 (1960)으로 휴지화되고, 지병을 얻어 목숨마저 잃어버린 비운의 사연이 그것입니다.
♣마장동에 왜 도축장이 들어서고 축산물시장은 떠나지 않을까?= 소 도살을 금했으나 쇠고기에 대한 수요가 많아 밀도살이 횡행했던 500여년의 서울 역사에서 현대식 도축장이 들어선 것은 대한제국기인 1909년. 이 때 신설리와 합동에 한반도 최초 도축장이 건립됐습니다.
이후 아현동도축장 (합동 도축장이 이전)과 경성부내 사설 도축장을 통합해 1917년 현저동 도축장을 지었습니다. 1922년 또다시 숭인동 도축장이 신설되는 등 현대식 도축장의 입지 해결은 어려운 과제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도축 폐수의 처리가 쉽고 도심으로 육류를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 마장동이 최적합지로 지목돼 숭인동의 가축시장 도축장의 이전이 확정됐으나 중일전쟁으로 실현되진 못했다는 역사입니다.
광복 이후, 서울시가 이 계획을 받아들여 가축시장 (1958) 도축장 (1961)을 마장동에 설립했고 시민들에 의해 축산물시장이 자생적으로 형성돼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가축시장은 1974년, 도축장은 1998년에 사라집니다.
마장축산물시장 상인들은 현재 "지방에서 도축된 소, 돼지의 저렴한 운임과 원활한 물량 수급을 위해 마장동을 떠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양 양반, 경성인, 서울 서민의 고기밥상=전시회 '서울 푸줏간'은 서울 사람의 밥상 위에 '고기'가 주연이 되고 '일두백미 一頭百味'를 남녀노소가 알기까지 과정도 소개됩니다.
농업을 나라 근간으로 여긴 조선시대에 소의 도살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300년 전 한양 양반들은 음력 시월 초하루에 야외에서 쇠고기를 구워 먹는 모임인 '난로회煖爐會'를 가졌다고 하네요.
도축장과 시장 곳곳에 정육점이 들어선 일제강점기의 경성인들은 소, 돼지의 살코기와 부산물을 이용해 고급요리점에서 '신선로 神仙爐'를, 서민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문화를 탄생시킨 '설렁탕'을 즐겼습니다.
전시회에서는 1960년대 경제 개발의 최전선에서 힘들게 노동하던 사람들의 지친 배를 채워주며 위안을 주던 왕십리의 유명한 해장국집인 '대중옥'을 재현합니다. 관람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는 무료.[이미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한경닷컴 뉴스국 윤진식 편집위원 jsyoon@hankyung.com
푸줏간 사람들이 이른바 '신의 손놀림'으로 '일두백미 一頭百味' (소 1마리에서 나오는 100가지 맛)를 창조하는 모습에서 근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래 전 외국인의 눈에 이처럼 신비롭게 비친 기술이 전승된 서울의 대표적인 장소 '마장동 푸줏간'이 베일을 확 벗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이 6월 28일부터 9월 14일까지 개최하는 기획전시회 ‘서울의 푸줏간’을 통해서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마장축산물시장의 발골 및 정형사들은 소, 돼지를 분해해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만들기 위해 10년 가까운 ‘수련’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획득된 이들의 손놀림은 순식간에 소 1마리를 10개 부위로 대분할하고 39개의 부분육으로 소분할한 뒤 100여 가지의 판매부위로 정확하게 나눕니다. 또 돼지 1마리는 7개의 큰 부위로 대분할된 뒤 22개 부분육으로 소분할되고요.
마장축산물시장 사람들은 이에 대해 이른바 '백정들이 하는 미천한 일'이라며 그동안 외부에 노출하는 것을 극히 꺼렸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측은 이들이 서울 시민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체형과 체급이 각기 다른 소, 돼지를 정확한 부위로 나누는 작업의 전과정'을 영상으로 최초로 공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서울의 푸줏간' 주제의 기획전은 서울시 최초로 가축시장과 도축장, 축산물시장이 한 곳에 설치된 마장동을 전면적으로 조명하는 게 특징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도심 부적격시설로 지목되면서도 수도권 육류의 70%를 공급하며 흔히 '서울시민의 영양분 공급소'로 불리는 마장축산물시장이 언제, 왜 하필 이 곳에 반세기 넘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전시회를 미리 둘러봤습니다.
♣살곶이목장과 간송 전형필의 땅에 농사짓던 '마장동 김씨네'=마장동 馬場洞은 조선시대 왕실 및 관청의 말을 기르던 '살곶이목장 箭串場'의 수말을 기르던 지역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살곶이목장은 말의 사육 및 궁중의 목장, 왕의 가마를 관장하던 사복시 司僕寺 소속의 양마장 養馬場 이지요. 때문에 마장동은 왕이 말을 지켜보았던 '화양정 華陽亭' 말먹이를 키우던 '장안평 長安坪' 암말을 기르던 ‘자양동 紫陽洞’과 함께 현재까지 관련 지명이 남은 곳으로 불립니다.
마장축산물시장이 들어서기 전 마장동은 미나리 무 배추밭이 즐비한 농촌마을. 이번 전시회에서는 우리나라 대표 문화재 수집가인 간송 전형필의 땅에 농사를 지었던 마장동 토박이 '김영진씨 일가'의 80년여 생활상을 통해 이 곳 사람들의 '아픈' 과거를 되돌아 봅니다.
김영진이 간송 전형필의 땅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지급했던 영수증, 김영진씨네 2대인 김용록이 중일전쟁에 참전하고 대가로 받은 채권이 한일협정 (1960)으로 휴지화되고, 지병을 얻어 목숨마저 잃어버린 비운의 사연이 그것입니다.
♣마장동에 왜 도축장이 들어서고 축산물시장은 떠나지 않을까?= 소 도살을 금했으나 쇠고기에 대한 수요가 많아 밀도살이 횡행했던 500여년의 서울 역사에서 현대식 도축장이 들어선 것은 대한제국기인 1909년. 이 때 신설리와 합동에 한반도 최초 도축장이 건립됐습니다.
이후 아현동도축장 (합동 도축장이 이전)과 경성부내 사설 도축장을 통합해 1917년 현저동 도축장을 지었습니다. 1922년 또다시 숭인동 도축장이 신설되는 등 현대식 도축장의 입지 해결은 어려운 과제였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도축 폐수의 처리가 쉽고 도심으로 육류를 원활하게 공급할 수 있는 마장동이 최적합지로 지목돼 숭인동의 가축시장 도축장의 이전이 확정됐으나 중일전쟁으로 실현되진 못했다는 역사입니다.
광복 이후, 서울시가 이 계획을 받아들여 가축시장 (1958) 도축장 (1961)을 마장동에 설립했고 시민들에 의해 축산물시장이 자생적으로 형성돼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가축시장은 1974년, 도축장은 1998년에 사라집니다.
마장축산물시장 상인들은 현재 "지방에서 도축된 소, 돼지의 저렴한 운임과 원활한 물량 수급을 위해 마장동을 떠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양 양반, 경성인, 서울 서민의 고기밥상=전시회 '서울 푸줏간'은 서울 사람의 밥상 위에 '고기'가 주연이 되고 '일두백미 一頭百味'를 남녀노소가 알기까지 과정도 소개됩니다.
농업을 나라 근간으로 여긴 조선시대에 소의 도살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300년 전 한양 양반들은 음력 시월 초하루에 야외에서 쇠고기를 구워 먹는 모임인 '난로회煖爐會'를 가졌다고 하네요.
도축장과 시장 곳곳에 정육점이 들어선 일제강점기의 경성인들은 소, 돼지의 살코기와 부산물을 이용해 고급요리점에서 '신선로 神仙爐'를, 서민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배달문화를 탄생시킨 '설렁탕'을 즐겼습니다.
전시회에서는 1960년대 경제 개발의 최전선에서 힘들게 노동하던 사람들의 지친 배를 채워주며 위안을 주던 왕십리의 유명한 해장국집인 '대중옥'을 재현합니다. 관람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는 무료.[이미지=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한경닷컴 뉴스국 윤진식 편집위원 js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