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바람 맛보고 바다를 거닐고 음식을 즐기면 이게 補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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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숲·섬·맛 기행
< 補藥 : 보약 >
짱뚱어 다리·해변 솔 숲…느릿느릿 걷다보니 더위도 잊혀지네
신안 민어·무안낙지…수만년 뻘이 키워낸 맛 '개미지네'
< 개매지네 : '최고로 맛있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
< 補藥 : 보약 >
짱뚱어 다리·해변 솔 숲…느릿느릿 걷다보니 더위도 잊혀지네
신안 민어·무안낙지…수만년 뻘이 키워낸 맛 '개미지네'
< 개매지네 : '최고로 맛있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
너무 많은 세파에 시달려 왔다.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하루가 멀다 하고 불안감이 든다. 힘들고 지칠 때 저절로 튀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여행’이다. 하지만 인파로 북적이는 여행지와 만만찮은 경비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호젓하게 ‘숲’을 거닐고, 생명의 근원인 ‘바다’를 만나고, ‘맛’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어떨까. 지친 당신에게 보약이 돼 줄 여행을 떠나보자.
근원을 찾아 떠나는 숲 여행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나의 나무 아래서’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마을의 숲에는 사람들마다 ‘나의 나무’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은 뿌리를 통해 모두 ‘나의 나무’에게로 돌아간다고.
나무는 근원에 이르는 통로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도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우주의 축인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에게 지혜를 구했다. 중국의 기서 ‘산해경’에는 황제가 가꾸고 지켰던 건목(建木)이란 우주목이 등장한다. 단군신화 속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도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다.
세계 각국의 산악숭배 신앙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신목처럼 성산 또한 우주의 축으로 신성시됐다. 티벳의 성산 카일라스(수미산)나 태백산도 마찬가지다. 한국 곳곳의 당나무(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나무)와 당산, 당숲 또한 사람과 신을 소통하게 해준 하나의 축이었다. 물질 숭배가 극에 달한 이 시대, 다시 근원을 찾아 숲으로 가보자. 오래된 숲을 거닐며 나무 어르신들에게 묻고 응답을 들으며 위로받고 지혜를 얻어오자. 황무지가 된 정신마저 비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솔바람이 솔솔 분다 - 경북 청도 운문사 솔숲
운문사 입구부터 시작되는 솔숲은 대표적인 사찰 송림 중 하나다. 상서로운 붉은 빛이 도는 소나무들은 금강송만큼이나 수려하다. 이 솔숲 사이로 솔바람길이 나 있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300여명의 학인 스님들이 공부한다.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한 신승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지며, 진평왕 30년(608년)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국사에 의해 1차 중창됐다. 고려시대에는 일연선사가 주지로 추대된 뒤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운문사 경내의 처진 소나무는 1년에 한 차례 막걸리를 열 말씩이나 공양 받는 귀한 몸이다.
운문사에 가면 꼭 들어야 하는 것이 새벽예불 소리다. 솔숲 길을 걸어 대웅보전에 가면 300여 비구니 스님들의 장엄한 독경 소리가 감동적이다. 대웅보전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다 주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떠나려는 반야용선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이가 있다. ‘악착보살’이다. 우리네 모습을 닮아 서글프면서도 위로가 된다. 치유의 피톤치드, 통영 편백숲
경남 통영의 미륵산 미래사는 법정 스님이 출가해서 행자생활을 하며 나무꾼으로 살았던 절이다. 미래사 주변에는 16만5000여㎡에 이르는 신비로운 편백숲이 있다. 통영을 종종 여행하는 사람도 이곳을 아는 이는 드물다. 편백은 다른 침엽수보다 3배 이상의 피톤치드를 뿜어내 치유효과가 뛰어나다.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수령 60~100년 사이가 가장 많다고 한다. 일제 때 조성한 미래사 편백숲의 수령이 그 정도다.
일본에서는 편백이 가장 귀중한 목재로 쓰인다. 궁궐을 비롯한 신사 등 전통 건축물이 편백으로 지어졌다. 불상도 대부분 편백으로 만든다. 편백이 암을 비롯한 난치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 미래사 편백숲에도 더러 환자들이 찾아와 숲의 신령한 기운을 받고 기력을 얻어 간다.
숨겨진 국토의 속살, 섬
지구는 물의 행성이다. 지구 표면의 70%가 바다다.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인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도 우리는 바다를 떠나 살 수 없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바다를 즐겼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서핑이다. 최초의 생명체가 바다에서 탄생했듯이 인류 또한 바다에서 생명 활동을 시작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는 어머니다. 프랑스어 어머니(me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도 어머니(母)가 들어 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하는 셈이다. 한국의 영해는 영토보다 3배쯤 넓다. 그 가운데 4400여개의 섬이 있고 그중 유인도는 500여개다. 섬에는 아직도 사람살이와 자연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다. 섬은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 에너지를 충전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갯벌의 생태가 그대로, 신안 증도
연륙교가 놓인 섬. 전남 신안군 증도의 검산마을 갯벌에서 한 여자가 낙지를 잡고 있다. 뻘 속 깊이 손을 집어넣어 낙지를 잡는다. 너른 갯벌 어디에 무엇이 사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것처럼 낙지 구멍을 찾아 쏙쏙 잘도 뽑아낸다. 그녀는 갯벌에 무릎을 꿇고 낙지를 잡는다. 갯벌의 기도! 기도란 본디 저런 것이다. 갯벌뿐이랴. 땅에 무릎 꿇고 논밭을 일구는 농부들. 삶이 간절할수록 사람들의 기도는 땅바닥에 밀착된다. 진정한 기도란 저렇게 논과 밭, 갯벌에 무릎 꿇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기적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증도가 슬로시티가 된 것은 갯벌 생태와 염전 문화의 우수성 때문이다. 증도에는 펄갯벌과 모래갯벌, 혼합갯벌 등 다양한 종류의 갯벌들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단일 염전으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태평염전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두 배나 된다. 증도는 한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이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며 람사르 습지이기도 하다. 바다를 가로질러 갯벌 위로 난 짱뚱어 다리도 증도의 명물이다. 4㎞의 명사십리 우전해변을 따라 조성된 솔숲인 ‘천년의 숲’엔 무려 10만그루의 소나무가 십리해변을 따라 도열해 사람들에게 안식을 준다. 걷기 좋은 아름다운 섬 ,보령 삽시도
섬의 형태가 마치 화살이 꽂힌 활과 같다 해서 삽시도다. 충남 보령시에 있는 삽시도는 충남의 섬들 중에서 외연도와 함께 가장 걷기 아름다운 섬으로 손꼽힌다. 섬의 최고점이 113m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낮은 평지와 구릉이다. 작은 섬이지만 거멀너머·진너머·밤섬해변 등 아름다운 백사장이 세 곳이나 있다. 섬은 또 온통 솔밭이다. 솔숲은 옛 모습 그대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더없이 편안한 안식을 준다.
진너머해변에서 밤섬해변까지 해안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둘레길도 새로 조성돼 있다. 하지만 진짜 아름다운 길은 밤섬마을에서 진너머해변까지 가는 옛길이다. 아름드리 해송 숲을 지나는 이 길엔 자연스러운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다. 농사를 짓다가 묵혀둔 수루미 마을의 논은 습지로 변해 개구리떼 우는 소리로 생명력 넘친다. 89㏊나 되는 너른 갯벌에서 기르는 삽시도 바지락은 씨알이 굵고 맛있기로 명성이 자자한데 허락을 받으면 바지락 캐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음식의 치유, 남도 맛 기행
멋의 어원은 맛이다. 맛이란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맛을 따질 여력이 없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맛이 부족한 것은 그 때문이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된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음식 하면 남도다. 남도에 음식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제만경, 나주평야 같은 곡창지대와 갯벌의 풍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남도 음식은 ‘개미’가 있다. ‘개미가 있다’는 전라도 사투리로 ‘맛이 있다’는 최고의 표현이다. 맛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깊이 숙성된 맛이 ‘개미’다. 숙성이란 젓갈이나 김치처럼 발효된 맛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도의 차진 갯벌 속에서 영근 낙지나 짱뚱어, 꼬막, 민어 같은 것도 개미가 있다. 그것은 수만년 숙성된 뻘이 키워낸 개미다. ‘오뉴월 서대 장대 앉았던 자리는 뻘도 맛있다’라거나 ‘복달임에 민어탕이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이란 식담도 그런 맛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민어로 기력 회복 - 신안 송도 위판장
민어는 여름 보양식의 대명사다.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운 여름이 제철이다. 그래서 삼복 중의 민어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여름 민어는 신안 임자도 어장에서만 잡힌다. 그 민어들의 총집산지가 바로 신안의 송도위판장이다. 민어는 복 더위를 이기는 데뿐만 아니라 산모들에게도 보양식이었다. 민어 곰국은 젖을 잘 나오게 한다. 민어는 보통 숙성회로 먹는다. 적당한 숙성 시간을 거치면 활어보다 선어가 더 쫄깃하고 맛있다. 민어의 껍질과 부레도 별미다. 부레는 날것으로도 먹지만 예전에는 속을 채워 순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껍질은 ‘민어 껍질에 밥 싸먹다 전답 다 팔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있다. 송도 위판장으로 들어온 민어들이 전국 각지의 수산시장이나 횟집으로 간다. 위판장 부근에는 즉석에서 민어회를 떠주는 곳들이 있고 그 뼈로 탕을 끓여주는 식당들도 있다. 싼값에 선도 좋은 민어회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송도 위판장만한 곳은 없다. 입에서 살살 녹는 낙지를 만나다 - 무안낙지골목
무안 읍내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여행자들이 들를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무안 낙지골목은 남도 여행자라면 꼭 들러 봐야 할 숨은 명소다. 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줄지어 놓여 있는 빨간 플라스틱 물통들이 이채롭다. 그 통 속에는 무안 갯벌과 신안 섬들에서 온 뻘낙지들이 가득 담겨 있다. 무더위에 지쳐 쓰러진 황소마저 벌떡 일어나게 만들던 뻘낙지의 효능. 질긴 돌낙지만 먹어본 사람들은 뻘낙지 탕탕이(산낙지회)를 보면 무슨 낙지가 이렇게 흐물거리냐고 타박할 수 있다. 하지만 한입 먹어보는 순간 살살 녹는 그 부드러운 맛에 깜짝 놀라고 만다. 특히 살짝 대쳐서 갖은 채소와 양념을 넣고 무쳐내는 산낙지 초무침은 더위에 잃어버린 입맛과 기력을 되살리는 별미 중의 별미다. 꼬치에 말아서 구워내는 낙지 호롱은 과거 남도의 시제 상에나 올라가던 귀물이다. 모두 놓치지 말아야 할 남도의 ‘개미진’ 맛들이다.
강제윤 시인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gilgu1@hanmail.net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나의 나무 아래서’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마을의 숲에는 사람들마다 ‘나의 나무’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은 뿌리를 통해 모두 ‘나의 나무’에게로 돌아간다고.
나무는 근원에 이르는 통로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도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우주의 축인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에게 지혜를 구했다. 중국의 기서 ‘산해경’에는 황제가 가꾸고 지켰던 건목(建木)이란 우주목이 등장한다. 단군신화 속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도 태백산 신단수 아래였다.
세계 각국의 산악숭배 신앙 역시 같은 맥락이다. 신목처럼 성산 또한 우주의 축으로 신성시됐다. 티벳의 성산 카일라스(수미산)나 태백산도 마찬가지다. 한국 곳곳의 당나무(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나무)와 당산, 당숲 또한 사람과 신을 소통하게 해준 하나의 축이었다. 물질 숭배가 극에 달한 이 시대, 다시 근원을 찾아 숲으로 가보자. 오래된 숲을 거닐며 나무 어르신들에게 묻고 응답을 들으며 위로받고 지혜를 얻어오자. 황무지가 된 정신마저 비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솔바람이 솔솔 분다 - 경북 청도 운문사 솔숲
운문사 입구부터 시작되는 솔숲은 대표적인 사찰 송림 중 하나다. 상서로운 붉은 빛이 도는 소나무들은 금강송만큼이나 수려하다. 이 솔숲 사이로 솔바람길이 나 있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300여명의 학인 스님들이 공부한다.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한 신승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지며, 진평왕 30년(608년)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국사에 의해 1차 중창됐다. 고려시대에는 일연선사가 주지로 추대된 뒤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운문사 경내의 처진 소나무는 1년에 한 차례 막걸리를 열 말씩이나 공양 받는 귀한 몸이다.
운문사에 가면 꼭 들어야 하는 것이 새벽예불 소리다. 솔숲 길을 걸어 대웅보전에 가면 300여 비구니 스님들의 장엄한 독경 소리가 감동적이다. 대웅보전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다 주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떠나려는 반야용선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이가 있다. ‘악착보살’이다. 우리네 모습을 닮아 서글프면서도 위로가 된다. 치유의 피톤치드, 통영 편백숲
경남 통영의 미륵산 미래사는 법정 스님이 출가해서 행자생활을 하며 나무꾼으로 살았던 절이다. 미래사 주변에는 16만5000여㎡에 이르는 신비로운 편백숲이 있다. 통영을 종종 여행하는 사람도 이곳을 아는 이는 드물다. 편백은 다른 침엽수보다 3배 이상의 피톤치드를 뿜어내 치유효과가 뛰어나다.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수령 60~100년 사이가 가장 많다고 한다. 일제 때 조성한 미래사 편백숲의 수령이 그 정도다.
일본에서는 편백이 가장 귀중한 목재로 쓰인다. 궁궐을 비롯한 신사 등 전통 건축물이 편백으로 지어졌다. 불상도 대부분 편백으로 만든다. 편백이 암을 비롯한 난치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 미래사 편백숲에도 더러 환자들이 찾아와 숲의 신령한 기운을 받고 기력을 얻어 간다.
숨겨진 국토의 속살, 섬
지구는 물의 행성이다. 지구 표면의 70%가 바다다.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인 것이다. 그래서 두려워도 우리는 바다를 떠나 살 수 없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바다를 즐겼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서핑이다. 최초의 생명체가 바다에서 탄생했듯이 인류 또한 바다에서 생명 활동을 시작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는 어머니다. 프랑스어 어머니(me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도 어머니(母)가 들어 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하는 셈이다. 한국의 영해는 영토보다 3배쯤 넓다. 그 가운데 4400여개의 섬이 있고 그중 유인도는 500여개다. 섬에는 아직도 사람살이와 자연의 원형이 많이 남아 있다. 섬은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 에너지를 충전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갯벌의 생태가 그대로, 신안 증도
연륙교가 놓인 섬. 전남 신안군 증도의 검산마을 갯벌에서 한 여자가 낙지를 잡고 있다. 뻘 속 깊이 손을 집어넣어 낙지를 잡는다. 너른 갯벌 어디에 무엇이 사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것처럼 낙지 구멍을 찾아 쏙쏙 잘도 뽑아낸다. 그녀는 갯벌에 무릎을 꿇고 낙지를 잡는다. 갯벌의 기도! 기도란 본디 저런 것이다. 갯벌뿐이랴. 땅에 무릎 꿇고 논밭을 일구는 농부들. 삶이 간절할수록 사람들의 기도는 땅바닥에 밀착된다. 진정한 기도란 저렇게 논과 밭, 갯벌에 무릎 꿇고 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기적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증도가 슬로시티가 된 것은 갯벌 생태와 염전 문화의 우수성 때문이다. 증도에는 펄갯벌과 모래갯벌, 혼합갯벌 등 다양한 종류의 갯벌들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단일 염전으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태평염전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두 배나 된다. 증도는 한국 최초의 갯벌도립공원이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며 람사르 습지이기도 하다. 바다를 가로질러 갯벌 위로 난 짱뚱어 다리도 증도의 명물이다. 4㎞의 명사십리 우전해변을 따라 조성된 솔숲인 ‘천년의 숲’엔 무려 10만그루의 소나무가 십리해변을 따라 도열해 사람들에게 안식을 준다. 걷기 좋은 아름다운 섬 ,보령 삽시도
섬의 형태가 마치 화살이 꽂힌 활과 같다 해서 삽시도다. 충남 보령시에 있는 삽시도는 충남의 섬들 중에서 외연도와 함께 가장 걷기 아름다운 섬으로 손꼽힌다. 섬의 최고점이 113m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낮은 평지와 구릉이다. 작은 섬이지만 거멀너머·진너머·밤섬해변 등 아름다운 백사장이 세 곳이나 있다. 섬은 또 온통 솔밭이다. 솔숲은 옛 모습 그대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더없이 편안한 안식을 준다.
진너머해변에서 밤섬해변까지 해안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둘레길도 새로 조성돼 있다. 하지만 진짜 아름다운 길은 밤섬마을에서 진너머해변까지 가는 옛길이다. 아름드리 해송 숲을 지나는 이 길엔 자연스러운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다. 농사를 짓다가 묵혀둔 수루미 마을의 논은 습지로 변해 개구리떼 우는 소리로 생명력 넘친다. 89㏊나 되는 너른 갯벌에서 기르는 삽시도 바지락은 씨알이 굵고 맛있기로 명성이 자자한데 허락을 받으면 바지락 캐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음식의 치유, 남도 맛 기행
멋의 어원은 맛이다. 맛이란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다면 맛을 따질 여력이 없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맛이 부족한 것은 그 때문이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된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음식 하면 남도다. 남도에 음식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제만경, 나주평야 같은 곡창지대와 갯벌의 풍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남도 음식은 ‘개미’가 있다. ‘개미가 있다’는 전라도 사투리로 ‘맛이 있다’는 최고의 표현이다. 맛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깊이 숙성된 맛이 ‘개미’다. 숙성이란 젓갈이나 김치처럼 발효된 맛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도의 차진 갯벌 속에서 영근 낙지나 짱뚱어, 꼬막, 민어 같은 것도 개미가 있다. 그것은 수만년 숙성된 뻘이 키워낸 개미다. ‘오뉴월 서대 장대 앉았던 자리는 뻘도 맛있다’라거나 ‘복달임에 민어탕이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이란 식담도 그런 맛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민어로 기력 회복 - 신안 송도 위판장
민어는 여름 보양식의 대명사다.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운 여름이 제철이다. 그래서 삼복 중의 민어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여름 민어는 신안 임자도 어장에서만 잡힌다. 그 민어들의 총집산지가 바로 신안의 송도위판장이다. 민어는 복 더위를 이기는 데뿐만 아니라 산모들에게도 보양식이었다. 민어 곰국은 젖을 잘 나오게 한다. 민어는 보통 숙성회로 먹는다. 적당한 숙성 시간을 거치면 활어보다 선어가 더 쫄깃하고 맛있다. 민어의 껍질과 부레도 별미다. 부레는 날것으로도 먹지만 예전에는 속을 채워 순대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껍질은 ‘민어 껍질에 밥 싸먹다 전답 다 팔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있다. 송도 위판장으로 들어온 민어들이 전국 각지의 수산시장이나 횟집으로 간다. 위판장 부근에는 즉석에서 민어회를 떠주는 곳들이 있고 그 뼈로 탕을 끓여주는 식당들도 있다. 싼값에 선도 좋은 민어회를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송도 위판장만한 곳은 없다. 입에서 살살 녹는 낙지를 만나다 - 무안낙지골목
무안 읍내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여행자들이 들를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무안 낙지골목은 남도 여행자라면 꼭 들러 봐야 할 숨은 명소다. 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줄지어 놓여 있는 빨간 플라스틱 물통들이 이채롭다. 그 통 속에는 무안 갯벌과 신안 섬들에서 온 뻘낙지들이 가득 담겨 있다. 무더위에 지쳐 쓰러진 황소마저 벌떡 일어나게 만들던 뻘낙지의 효능. 질긴 돌낙지만 먹어본 사람들은 뻘낙지 탕탕이(산낙지회)를 보면 무슨 낙지가 이렇게 흐물거리냐고 타박할 수 있다. 하지만 한입 먹어보는 순간 살살 녹는 그 부드러운 맛에 깜짝 놀라고 만다. 특히 살짝 대쳐서 갖은 채소와 양념을 넣고 무쳐내는 산낙지 초무침은 더위에 잃어버린 입맛과 기력을 되살리는 별미 중의 별미다. 꼬치에 말아서 구워내는 낙지 호롱은 과거 남도의 시제 상에나 올라가던 귀물이다. 모두 놓치지 말아야 할 남도의 ‘개미진’ 맛들이다.
강제윤 시인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gilgu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