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피케티 열풍'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가히 ‘피케티 열풍’이다. 마흔두 살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저서 ‘21세기 자본론(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영문판으로 나오기 무섭게 미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폴 크루그먼, 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좌파 석학들은 ‘10년래 가장 뛰어난 경제학 서적’이라고까지 치켜세운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토록 떠들썩할까.

피케티 주장은 최상위 1%에 소득과 부가 집중되면서 사회가 19세기 말의 세습자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1700년 이후 주요국의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을 분석했다. 그 결과 자본수익률은 늘 성장률을 앞질렀으며 그것이 불평등의 씨앗이 됐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을 해서 버는 돈은 물려받은 재산이 벌어들인 돈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성장 시대의 자본수익률은 임금이나 전체 소득(GDP)보다 훨씬 빠르게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부의 집중은 권력을 낳고, 권력은 부의 방패막이가 되면서 사회는 과두체제로 흘러갈 공산이 커졌다는 것이다.

관심은 그의 대안이다. 그는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누진세’다. 소득 상위 1%에 최고 80%의 소득세를 물리고, 매년 10%의 부유세를 부과하자는 것이다. 각국이 공조해 부자들의 자산을 찾아내고 누진세를 부과하는 글로벌 부유세다. 상속세도 정비해 부의 축적을 원천 봉쇄하자는 제안이다.

그의 방대한 분석과 과감한 대안 제시에 호평이 끊이지 않는다.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가능하게 됐다는 찬사도 줄을 잇는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반대론자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각국 정부의 공조부터 그렇다. 아예 그의 주장을 이데올로기적 장광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한 것은 월스트리트저널이다. 사실 피케티는 프랑스 사회당을 공개 지지하고 올랑드 정부의 부유세 입안에 관여한 인물이다. 연 100만유로 이상 소득자에 대해 75%의 소득세를 부과하려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으로부터 위헌 판결을 받은 그 법안이다. 부자 3000명을 벌주자는 포퓰리즘을 지지한 학자라는 얘기다.

부를 부도덕의 산물로 보는 시각도 그렇다. 기업가정신과 혁신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성공은 언제나 부패로 얼룩져 있다고 본다. 중국과 인도에서만 매년 4000만명의 중산층이 배출돼 글로벌 양극화가 완화되고 있다는 사실도 애써 외면한다. 그의 약점이다. 그런 약점에도 그의 주장은 이미 논쟁의 꼬리를 물며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그의 주장을 아무 여과 없이, 오히려 왜곡해 전달하는 한국의 일부 언론과 세력이다. 벌써 피케티를 빙자한 자극적인 주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불평등에 분노하라’며 부자 증세를 부추긴다. ‘월가 점령 시위’를 국내로 끌어들여 소위 ‘경제민주화 논쟁’을 증폭시킨 그 세력이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부에 대해 징벌적 세금을 매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상속세부터 최고세율이 50%다. 최대주주의 경우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합쳐 최고 65%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업승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오히려 캐나다 호주 스웨덴처럼 상속세를 폐지해야 마땅한 상황이다. 게다가 상위 10%의 고소득자가 낸 소득세는 근로소득세의 68%, 종합소득세의 85%에 이른다. 하위 40%는 세금을 거의 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부자증세 타령이다.

한국의 양극화는 선진국에 비해 크게 걱정할 수준이 아니다. 통계청이 공식 발표하는 지니계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18위다. 보조지수나 설문조사 결과를 놓고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떠드는 것이 더 큰 문제일 뿐이다.

세금으로 상위 1% 계층을 끌어내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99%를 끌어올리는 것이 진정한 불평등 완화일 것이다. 성장과 고용 안정, 교육 개혁이 그 방법이다. 출판업자들이 곧 피케티의 책을 한글화할 것이다. 건전한 토론이 있길 바란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