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염상섭 옆자리 비워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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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누가 놓고 간 걸까. 봄볕이 따사로운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입구, 벤치에 한쪽 팔을 두르고 앉은 염상섭 동상 곁의 도시락 꾸러미. 책을 몇 권 사서 나오다가 다시 봤더니 오호라! 김밥을 나눠 먹으며 낄낄대는 장난꾸러기, 그림책을 넘기면서 까르륵거리는 계집아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연신 함박웃음을 짓는 부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소설가 염상섭 동상은 원래 생가 근처인 종묘공원에 있었다. 1996년 문학의 해에 조각가 김영중 씨가 교보생명·교보문고 후원으로 만들었는데, 5년 전 종묘공원 정비 과정에서 삼청공원 약수터로 이전했다가 이달 초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의 옆자리는 양쪽 다 비어 있다.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은 왼편으로 두어 사람, 오른쪽으로 한 사람쯤 들어가 앉으면 맞춤하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오른손에는 책이 한 권 쥐어져 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아이들에게 읽어주려던 것일까. 서른둘에 늦장가를 가서 아들 둘, 딸 둘을 얻은 그였다.
미래 독자·작가와 '삼대' 구상
그 빈자리에는 누구나 앉아 쉴 수 있다. 하지만 50년 전 세상을 떠난 한국 근대문학 거봉의 염원으로 보자면 그 자리의 첫 번째 주인은 미래의 독자인 아이들이 좋겠다. 이마에 혹이 난 그의 얼굴 위로 봄 햇살만큼 화사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아이들을 공신(工神·공부의 신)이 아니라 독신(讀神·독서의 신)으로 키우는 건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현역 작가들이 그 자리에 앉으면 좋겠다. 실험실의 해부용 개구리 같은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3·1운동 직후의 시대상을 냉철하게 묘사했던 그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 중인 우리 작가들. 그가 ‘삼대’를 통해 구세대·과도기·신세대의 갈등과 봉건지주·개화·자본주의의 지층까지 보여준 게 83년 전이니 벌써 3세대나 지났다.
그 역사의 나이테 위에 우리가 새로 새겨야 할 작품은 무엇일까. 한국 문학의 미래를 밝힐 21세기판 ‘삼대’가 그 자리에서 나온다면 더 없이 기쁜 일이다. 다음주 수요일(23일)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책의 날이니 더욱 잘됐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세상을 떠난 날, 우리는 염상섭 동상의 반짝이는 빈자리에서 새로운 문학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책 읽어주는 대통령 모습도 굿!
또 하나, 유쾌하고도 발칙한 아이디어. 대통령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대통령이라…. 다른 나라 대통령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부러웠다. 바쁘기로 으뜸가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틈틈이 교실이나 정원에서 동화를 읽어주며 친밀감을 높이고 미래 세대의 꿈도 북돋아 주곤 한다. 우린들 왜 안 되겠는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국민이 열 중 셋이나 된다는데,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도 책에서 나오는 것인데….
나아가 이곳에서 책 낭독모임이나 시 낭송회를 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교보빌딩 앞 야외공원에서 ‘시가 있는 봄’ 시화전을 열어도 좋다. 프랑스 파리의 봄시 축제처럼 말이다.
염상섭 동상 옆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교보문고 창업자의 말인데, 이렇듯 거창한 문구가 아니면 또 어떤가. 책 읽고 생각 근육을 키우는 일이 저마다 마음속의 빈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일진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소설가 염상섭 동상은 원래 생가 근처인 종묘공원에 있었다. 1996년 문학의 해에 조각가 김영중 씨가 교보생명·교보문고 후원으로 만들었는데, 5년 전 종묘공원 정비 과정에서 삼청공원 약수터로 이전했다가 이달 초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의 옆자리는 양쪽 다 비어 있다. 비스듬히 다리를 꼬고 앉은 왼편으로 두어 사람, 오른쪽으로 한 사람쯤 들어가 앉으면 맞춤하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오른손에는 책이 한 권 쥐어져 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눈망울을 반짝거리던 아이들에게 읽어주려던 것일까. 서른둘에 늦장가를 가서 아들 둘, 딸 둘을 얻은 그였다.
미래 독자·작가와 '삼대' 구상
그 빈자리에는 누구나 앉아 쉴 수 있다. 하지만 50년 전 세상을 떠난 한국 근대문학 거봉의 염원으로 보자면 그 자리의 첫 번째 주인은 미래의 독자인 아이들이 좋겠다. 이마에 혹이 난 그의 얼굴 위로 봄 햇살만큼 화사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는 풍경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아이들을 공신(工神·공부의 신)이 아니라 독신(讀神·독서의 신)으로 키우는 건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현역 작가들이 그 자리에 앉으면 좋겠다. 실험실의 해부용 개구리 같은 현실에 가슴 아파하며 3·1운동 직후의 시대상을 냉철하게 묘사했던 그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 중인 우리 작가들. 그가 ‘삼대’를 통해 구세대·과도기·신세대의 갈등과 봉건지주·개화·자본주의의 지층까지 보여준 게 83년 전이니 벌써 3세대나 지났다.
그 역사의 나이테 위에 우리가 새로 새겨야 할 작품은 무엇일까. 한국 문학의 미래를 밝힐 21세기판 ‘삼대’가 그 자리에서 나온다면 더 없이 기쁜 일이다. 다음주 수요일(23일)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책의 날이니 더욱 잘됐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세상을 떠난 날, 우리는 염상섭 동상의 반짝이는 빈자리에서 새로운 문학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책 읽어주는 대통령 모습도 굿!
또 하나, 유쾌하고도 발칙한 아이디어. 대통령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대통령이라…. 다른 나라 대통령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부러웠다. 바쁘기로 으뜸가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틈틈이 교실이나 정원에서 동화를 읽어주며 친밀감을 높이고 미래 세대의 꿈도 북돋아 주곤 한다. 우린들 왜 안 되겠는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국민이 열 중 셋이나 된다는데,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도 책에서 나오는 것인데….
나아가 이곳에서 책 낭독모임이나 시 낭송회를 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교보빌딩 앞 야외공원에서 ‘시가 있는 봄’ 시화전을 열어도 좋다. 프랑스 파리의 봄시 축제처럼 말이다.
염상섭 동상 옆에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교보문고 창업자의 말인데, 이렇듯 거창한 문구가 아니면 또 어떤가. 책 읽고 생각 근육을 키우는 일이 저마다 마음속의 빈자리에서 출발하는 것일진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