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부대 복무시절 서종대 원장(오른쪽)이 보고를 받으며 통화하고 있다.
맹호부대 복무시절 서종대 원장(오른쪽)이 보고를 받으며 통화하고 있다.
나는 1983년 3월 학사장교 3기로 입대했다. 당시 나는 행정고시 1차 합격 후 2차에 떨어지면 군대에 가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연달아 합격해 입대 시기를 조정할 수 있었다. 육군 소령이던 형의 권유로 보병장교에 지원했다. 하지만 경기 가평군 현리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경리장교로 배치받았다. 48㎏밖에 되지 않는 마른 체구 때문이었던 것 같다.

[1社 1병영] 서종대 한국감정원장 "軍에서 만난 인연, 나를 살찌워 준 맹호부대"
나는 행시 합격 후 학사장교로 육군에 간 특이한 경우다. 당시 고시 합격자들은 대부분 1순위로 공군을, 2순위로 해군을 각각 선호했다. 육군은 ‘고생 좀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주로 지원했다. 내가 입대할 때는 행정장교 50여명 중 육군 지원자가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나에게 군대는 살아오면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동생들을 돌보는 가장의 짐을 내려놓고, 나를 되돌아볼 수 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 준 곳이기도 하다.

당시 나와 함께 일하던 사병들은 본부대대 소속이었다. 본부대장에게 동의를 구한 뒤 자주 밖에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줬다. 경리 업무 때문에 사병들 중 다수는 상고 출신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지금 은행 지점장 등 금융권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학사장교 동기 및 사병들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연락하고 가끔 만나서 회포도 푼다.

지금의 아내도 군대에서 만났다. 나의 임무 중 하나는 한 달에 한 번 서울 이태원동 육군중앙경리단으로 출장을 가는 일이었다. 당시 학사장교 1기로 중앙경리단에 있던 형님(뉴질랜드에서 변호사업을 하는 최유택 씨)이 여동생을 소개시켜 줬다. 1년간 사귀다 제대 후 결혼하게 됐다.

나는 군 복무 기간 동안 현리에서 세를 얻어 생활했다. 주말에는 인근 무악산에도 오르고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보냈다. 동네 분들은 축제가 있으면 늘 불러 줬다. 특히 내가 살던 방 근처에서 병원을 운영하시는 의사선생님은 내겐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 나를 자식처럼 여겨 힘들 때 영양제도 놔주고 오골계도 사다 끓여주셨다. 덕분에 제대할 때는 67㎏으로 입대 때보다 무려 20㎏이나 불었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영내(부대 내) 은행을 만들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경리장교로 군인들의 통장과 급여계좌를 관리하는 등의 업무를 맡았다. 이 업무를 하기 위해선 거래 은행에 직접 다녀와야 했다. 지금은 온라인 업무도 발달했고 부대 내 무인지급기가 보급돼 있다. 하지만 그때는 직접 방문을 통한 거래만 가능했다.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 시행한 것이 바로 영내 은행이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 시절인 2011년 11월부터 2년 동안 신입사원들과 함께 맹호부대를 종종 찾았다. 예전에 비해 군 위문활동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사내 사회공헌활동의 하나로 시작한 것이다. 한국감정원에서도 직원들이 군대 장비체험, 내무반 병영체험을 통해 애사심과 협동심을 기를 수 있는 위문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다. 군 장병을 격려하고 부대에 위문품을 지원하는 것은 나를 살찌워준 군대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는 뜻깊은 일이다.

서종대 < 한국감정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