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휴민트
첩보영화라면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등 멋진 판타지 활극부터 떠올린다. 주인공도 멋있고 로맨틱하다. 그러나 음지에서 일하며 온갖 고초를 겪는 스파이를 다룬 영화도 많다. 이는 보통의 첩보활극과 달리 에스피오나지(espionage) 장르로 구분한다. 엇비슷해 보여도 근본 시각이 다르다.

1962년 ‘007 살인번호’가 첩보영화의 황금기를 열면서 제임스 본드 역의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원작자의 정보국 근무 경험도 흥행에 한몫했다. 더 큰 역할은 육·해·공을 넘나드는 호쾌한 액션과 여성들을 휘감는 본드의 편력 등 판타지적 요소였다.

1965년에는 ‘제임스 본드는 잊어라!’는 카피를 앞세운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가 나와 007의 영웅주의와 낭만주의를 치받았다. 화려한 액션이나 첨단 장비 없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스파이들의 공작과 술수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었다. 역시 정보부 첩보요원이었던 원작자가 냉전기에 독일에서 활동한 이중간첩 이야기를 생생하게 다뤄 히트했다.

하지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영화와 소설이다. 실제 첩보원의 세계는 더없이 냉정하고 혹독하다. 피 말리는 정보전쟁뿐만 아니라 적의 역정보도 알아채야 하고 지휘부의 내밀한 의도까지 파악해야 한다. 정보수집 루트의 하나인 휴민트(인적 정보)는 휴먼(human·사람)과 인텔리전스(intelligence·정보)의 합성어다. 첨단 장비를 이용한 시진트(signal intelligence)와 함께 정보망의 양대 축을 이룬다.

인적 요소는 외교관이나 군인·경찰, 전쟁포로, 망명자나 난민, 비정부기구 구성원, 특수 정찰대 등을 포함한다. 내부 협조자를 두기도 하는데 무조건 보안이 우선이다. 발각되면 바로 끝이다. 이중간첩인 ‘두더지’로 변신하는 사례도 있고 은퇴할 때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행운아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기 때문에 진짜 적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유럽을 사로잡은 ‘만인의 연인’이자 간첩 혐의로 총살당한 마타 하리도 그렇다. 전쟁 중 프랑스, 영국, 독일 정보기관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했다는데, 정말로 스파이였는지 ‘두더지’였는지는 지금까지도 미궁이다. 물고 물리는 첩보의 세계에는 그래서 암묵적 완충지대도 필요하다.

세련되게 수습하는 사후 처리 또한 중요하다. 국정원 증거 위조 사건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급해도 휴민트까지 다 까발리면 어떡하나. 딱한 일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