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롱다리 新인류
미의 전형이라는 비너스상을 보면 상체와 하체 비율이 5 대 8이고, 허벅지와 종아리 비율도 5 대 8이다. 머리에서 배꼽까지를 1이라고 하면 그 아래는 1.618이다. 이게 피타고라스의 황금비율인데, 이집트 피라미드나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등이 이 원리로 만들어졌다. 명함, 신용카드, A4용지의 가로세로 비율도 비슷하다.

다리 길이를 측정할 때는 배꼽 높이의 골반 뼈끝에서 발끝까지를 잰다. 한국인의 다리 길이가 신장의 58~59% 정도라니 키 170㎝에 다리 100㎝면 58.8%로 ‘보통’이다. 비너스처럼 61%를 넘어야 ‘롱다리’ 축에 든다. 롱다리라는 말은 1993년 개그맨 이휘재가 최성훈과 함께 ‘롱다리’ ‘숏다리’ 유행어를 퍼뜨린 뒤 급속도로 확산됐다.

‘롱다리 열풍’은 교복과 운동화, 바지, 키 크는 식품 등 모든 분야로 번졌고, 한때 롱다리 선발대회까지 열렸다. 20여년이 지난 요즘 젊은이들의 다리는 부모 세대인 40~50대보다 평균 2㎝ 이상 길어졌다고 한다. 성장 환경과 식생활 개선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슈퍼모델이나 미스코리아, 프로농구선수 등 롱다리들의 ‘우월한 자태’를 바라보는 ‘숏다리의 비애’는 여전하다.

옛날에는 주요 경기 때마다 “서양 선수들에 비해 하지장이 짧아서 안타깝다”는 멘트가 단골로 등장했다. 특히 육상 높이뛰기는 마른 체격에 ‘롱다리’가 필수 조건이다. 반대로 몸을 웅크리거나 회전하는 다이빙 종목은 숏다리에게 유리하다. 미국 육상 스타 마이클 존슨은 주폭을 짧게 하고 발을 자주 내딛는 ‘숏다리 주법’으로 금메달을 휩쓸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의 메달밭인 빙상 쇼트트랙 역시 그랬다. 한국 선수들은 작은 체격의 순발력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와 1998년 나가노 대회에서 2연속 2관왕에 오른 전이경, 2006년 토리노 올림픽 3관왕을 차지한 진선유의 키는 164㎝였다. 이번 소치 올림픽 1500m에서 금메달을 딴 중국 저우양도 164㎝다.

그런데 아름다운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키 174㎝에 긴 다리를 지닌 ‘괴물 소녀’ 심석희가 괴력의 지구력을 발휘하며 3000m 계주에서 새로운 신화를 쓴 것이다. 유연성과 순발력을 타고난 그는 긴 다리를 이용한 스케이팅 주법에서도 발군이었다. 그야말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롱다리 신(新)인류’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뿐인가. ‘피겨 여왕’ 김연아와 함께 본선 진출에 성공한 ‘피겨 공주’ 김해진의 늘씬한 다리도 맞춤형 체형의 완결판이라니 이 또한 기대가 크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