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꼰대'와 봄의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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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서 듣게 되는 꼰대 소리
자신 돌아보고, 젊음에 양보해야
모진 겨울 뒤 봄이 오는 계절처럼"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대 교수 daeun@chugye.ac.kr >
자신 돌아보고, 젊음에 양보해야
모진 겨울 뒤 봄이 오는 계절처럼"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대 교수 daeun@chugye.ac.kr >
새 학기를 준비하는 이맘때쯤이면, 선연하게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198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필자는 언어철학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다. 200여명의 학생이 자리를 다투던, 나름 인기 있는 과목이었다. 한데 수업이 한창 진행되던 학기 중에, 담당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10년 전에 졸업한 제자가 오래간만에 찾아왔다. 온 김에 옛날에 열광했던 교수님의 강의를 다시 들어보고 싶다고 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업을 다 듣고 난 뒤 제자의 반응이 이러했다. “교수님, 10년 전의 강의 내용과 오늘의 강의 내용이 똑같아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물같이 흘렀고, 필자는 대학교수가 되어 있다. 언어철학 강의에서 배운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는데, 자신의 태만에 대해 자책하시던 교수님의 표정은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기를 믿고 10년이나 같은 강의를 했다는 그 교수님에 대해 필자가 지금까지 존경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이루어진 그 솔직한 고백이 그 다음 학기의 강의를 기대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필자가 대학 강단에서 열정을 잃을 때마다 그 교수님의 고백을 떠올려 스스로 경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번 겨울방학에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겨울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떠나온 다른 교사나 교수들과 조우하게 됐다. 그들과 나눈 화두 중에 ‘꼰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꼰대는 ‘아버지나 선생님을 일컫는 학생들의 은어’로, 번데기의 사투리인 ‘꼰데기, 꼰디기’에서 왔다는 설이 우세하다. 꼰대의 또 다른 어원은 일본어라는 주장인데, 일제강점기부터 나온 표현이란다. 일제를 겪은 노인에게 여쭈어보니, “특별히 나쁜 뜻이 아니라 나이든 사람을 일컫던 표현”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영어가 유창했던 한 여행 가이드가 ‘꼰대’의 어원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펼쳐 이목을 끌었다. 허세나 자기주장이 강한 어른을 꼰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꼰대’가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백작이라는 영어발음 컨트, 콘트(comte)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총독이 일본을 도운 조선 인사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 등 작위를 수여했는데, 조선 사람들이 백작 작위를 받은 허세가 많고 잘난 척하는 인사들을 콘데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그 후로 자신의 직위를 믿고 아랫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잔소리를 하거나 말로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은 아버지와 선생님뿐만 아니라 직장의 상사나 사장, 심지어 젊은이들도 또래의 친구들에게 꼰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애늙은이 같은 녀석, 고리타분한 어른들과 같은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정관념과 아랫사람이 자연스럽게 늘어나니, 우리 모두가 갈수록 꼰대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앞으로 여지없이 꼰대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들을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언어철학 강의를 예로 보면, 학생이나 아랫사람이 태클을 걸 때 자신을 돌아보고 솔직해지는 것도 한 가지 비법이지 싶다. 주름처럼, 가리려 해도 소용없는 것들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단편소설 제목처럼,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죽어 땅에 묻히는 순서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유지되는 이치가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과거 어른들에게 그러했듯이, 앞으로 젊은이들의 도전도 다행스럽게 계속 될 것이다. 그 기세 높던 동장군도 젊은 계절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줄 것이다.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대 교수 daeun@chugye.ac.kr >
10년 전에 졸업한 제자가 오래간만에 찾아왔다. 온 김에 옛날에 열광했던 교수님의 강의를 다시 들어보고 싶다고 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업을 다 듣고 난 뒤 제자의 반응이 이러했다. “교수님, 10년 전의 강의 내용과 오늘의 강의 내용이 똑같아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물같이 흘렀고, 필자는 대학교수가 되어 있다. 언어철학 강의에서 배운 내용은 거의 잊어버렸는데, 자신의 태만에 대해 자책하시던 교수님의 표정은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인기를 믿고 10년이나 같은 강의를 했다는 그 교수님에 대해 필자가 지금까지 존경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이루어진 그 솔직한 고백이 그 다음 학기의 강의를 기대하게 만들었고, 게다가 필자가 대학 강단에서 열정을 잃을 때마다 그 교수님의 고백을 떠올려 스스로 경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번 겨울방학에 유럽여행을 떠났다가 겨울방학을 이용해 여행을 떠나온 다른 교사나 교수들과 조우하게 됐다. 그들과 나눈 화두 중에 ‘꼰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꼰대는 ‘아버지나 선생님을 일컫는 학생들의 은어’로, 번데기의 사투리인 ‘꼰데기, 꼰디기’에서 왔다는 설이 우세하다. 꼰대의 또 다른 어원은 일본어라는 주장인데, 일제강점기부터 나온 표현이란다. 일제를 겪은 노인에게 여쭈어보니, “특별히 나쁜 뜻이 아니라 나이든 사람을 일컫던 표현”이라고 했단다.
그런데 영어가 유창했던 한 여행 가이드가 ‘꼰대’의 어원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펼쳐 이목을 끌었다. 허세나 자기주장이 강한 어른을 꼰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꼰대’가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백작이라는 영어발음 컨트, 콘트(comte)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총독이 일본을 도운 조선 인사들에게 공작 후작 백작 등 작위를 수여했는데, 조선 사람들이 백작 작위를 받은 허세가 많고 잘난 척하는 인사들을 콘데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그 후로 자신의 직위를 믿고 아랫사람에게 터무니없는 잔소리를 하거나 말로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사실 요즘은 아버지와 선생님뿐만 아니라 직장의 상사나 사장, 심지어 젊은이들도 또래의 친구들에게 꼰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애늙은이 같은 녀석, 고리타분한 어른들과 같은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정관념과 아랫사람이 자연스럽게 늘어나니, 우리 모두가 갈수록 꼰대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앞으로 여지없이 꼰대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들을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언어철학 강의를 예로 보면, 학생이나 아랫사람이 태클을 걸 때 자신을 돌아보고 솔직해지는 것도 한 가지 비법이지 싶다. 주름처럼, 가리려 해도 소용없는 것들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단편소설 제목처럼, ‘늙은 주검은 젊은 주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죽어 땅에 묻히는 순서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유지되는 이치가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과거 어른들에게 그러했듯이, 앞으로 젊은이들의 도전도 다행스럽게 계속 될 것이다. 그 기세 높던 동장군도 젊은 계절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줄 것이다.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대 교수 daeun@chugye.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