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4일은 연인들끼리 카드나 선물을 주고받는 밸런타인데이다. 유래가 어떻든 간에 한국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주로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통한다. 고백을 앞둔 이들은 설레는 마음에 들떠 있겠지만 누군가에는 또 다른 부담이다. ‘의무감’에 사로잡힌 오래된 연인들은 한참 전부터 ‘이번엔 어떤 선물을 사야 하나’는 고민에 휩싸인다. 회사 내 여직원들은 어느 부서, 어느 임원에게까지 초콜릿을 줘야 하는지를 생각하느라 골치가 아프다. 때론 밸런타인데이 선물이 직장 내에서 예기치 않은 오해를 낳고, 남녀 간 치열한 신경전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여자가 먼저 고백하긴 억울해”

지방은행 서울 분점에 다니는 A 대리(27)는 지난달 중순 여의도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회계사와 소개팅을 했다. 소개팅 남(男)은 서글서글한 외모에 유머감각까지 갖춰 A 대리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다행히 소개팅 남도 A 대리가 싫지 않았는지 소개팅 이후 ‘애프터 신청’을 했고 두 사람은 지금까지 만남을 갖고 있다. 둘 다 고향이 서울이어서 지난 설 연휴 때는 이틀 연이어 만나기도 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아직 서로에게 정식으로 고백한 적은 없다는 것. A 대리는 소개팅 남이 어떤 생각으로 고백하지 않는지 몰라 속만 태우고 있다.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도 걱정이다.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으로 마음을 고백하는 날로 알고 있어서다. A 대리는 “그가 좋긴 하지만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 선물을 준비하는 게 오버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라며 “그냥 넘어가면 섭섭해 할 것 같아 어떻게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고 답답해했다.

그나마 A 대리처럼 ‘여자가 고백하는 날’로 알고 있으면 다행이다. 통신장비업체에서 일하는 B 계장(31)은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3월14일·남자가 여자에게 선물을 주고 고백하는 날) 모두 남자로부터 근사한 선물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여자친구 때문에 매년 2~3월이 되면 머리를 싸맨다. 초콜릿과 사탕만 선물했다간 한동안 접근이 금지되는 등 ‘엄청난 보복’이 뒤따른다. B 계장은 “초콜릿만 줘도 된다면 열 번이라도 챙길 자신이 있다”며 “초콜릿은 초콜릿대로 골라야 하고 선물은 선물대로 사야 하니 정말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했다.

○“초콜릿과 선물 아닌 일로 평가합시다”

한 경제부처의 C 국장은 지난해 밸런타인데이를 잊을 수 없다. 부하 여자 사무관이 직접 쿠킹 클래스에서 만든 것이라며 수제 초콜릿 케이크를 선물해서다. 정성이 갸륵해 집에 가져가 식구들과 나눠 먹었다. 자녀들에게는 자신이 부하 직원들에게 이렇게 인기가 많다는 점을 자랑했다. C 국장은 “여직원들에게 초콜릿을 많이 받아봤지만 대부분 편의점에서 사온 것이었다”며 “직접 구운 케이크를 받아보니 기억에 확실하게 남았다”고 뿌듯해했다.

하지만 간혹 ‘충성 경쟁’이 붙어 뜻하지 않게 피해자를 만들 때도 있다. 여의도 증권사에 다니는 K 대리(30·여)는 같은 팀 2년 후배 여직원 때문에 밸런타인데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미모가 뒷받침되는 후배가 초콜릿을 예쁘게 포장해 모든 직원에게 나눠주기 때문이다. 손수 쓴 편지도 잊지 않아 받는 남자직원들의 입이 귀에 걸리곤 한다. 이럴 때면 K 대리는 업무 능력과 상관없이 자신이 ‘찬밥 신세’라는 점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는 “초콜릿을 주는 것도 좋지만 왜 내가 후배와 비교당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챙기면 좋고 안 챙겨도 그만인 밸런타인데이가 사람을 평가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토로했다.

○여친의 통큰 선물…모두가 감동

밸런타인데이 때 순수한(?) 의도로 초콜릿을 나눠주는 경우도 있다. 한 중장비업체 서울사무소에서 일하는 홍일점 사원 J씨는 6살 연하의 군인 남친을 뒀다. J씨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밸런타인데이 때도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을 택배를 통해 남친이 있는 군부대로 보낼 계획이다.

이런 J씨의 정성 때문에 밸런타인데이만 되면 남친 외에 그의 직장 동료들도 덩달아 신이 난다. J씨는 남친이 소속된 부대원 모두에게 초콜릿이 돌아가도록 엄청난 양의 초콜릿을 만드는데, 남는 초콜릿을 직장 내 팀원들에게도 대방출하기 때문이다. 평소 털털한 선머슴 캐릭터인 J씨의 수제 초콜릿을 맛본 동료들은 새삼 놀라게 된다고. “아무 의미없이 흘려보내기 쉬운 밸런타인데이가 J씨 덕분에 행복한 날이 됐죠. 복 받을 겁니다.”

○착각은 자유…받아도 오해는 금물


광고기획사에서 일하는 H씨(30)는 지난해 밸런타인데이 때 겪은 어이없는 경험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H씨는 지난해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자 같은 팀 남자 직원들에게 작은 초콜릿을 3개씩 포장해 돌렸다. 별 뜻 없이 ‘맛있게 드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초콜릿을 선물했는데 팀원들의 생각은 H씨와 달랐다. 3년 전 팀이 만들어진 이후 밸런타인데이 때 남자 직원에게 초콜릿을 돌린 여직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H씨가 미혼인 대리 한 명에게 마음이 있지만 들키는 게 싫어 모두에게 초콜릿을 돌린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H씨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이 대리는 H씨에게 적극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H씨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고 구애 공세를 펼치는 대리도 H씨의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H씨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남자 대리는 “H씨가 먼저 꾀어놓고 모른척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H씨가 회사 남자 동료들을 대상으로 ‘어장관리’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일로 상처를 받은 H씨는 이후로 남자 직원과 단둘이서는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는다.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다.

“남자 회사원들에게 개그콘서트 ‘깐죽거리 잔혹사’ 버전으로 말해주고 싶어요. 밸런타인데이 때 여직원으로부터 초콜릿을 받으면 놀라지 말고 맛있게 먹은 다음 ‘고맙다’고 말하면 ‘끝’이라고요.”

박신영/황정수/강경민/박한신/임현우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