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든 이곳은 고갯길을 걸어 올라야 했던 언덕마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굴레방다리라고도 불린다. 왜 그럴까. 이는 지금의 아현고가도로 아래 작은 개천에 놓였던 다리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포 쌀장수들이 잠시 머물며 우마의 굴레를 벗기는 방(옛날의 동 이름)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고개와 다리가 있던 마을 위로 국내 최초의 현대식 고가도로가 생기고 땅 밑으로는 지하철이 지나가는 걸 보면 옛날부터 최고의 교통요지였던 것 같다. 아현고가도로가 개통된 것은 1968년 9월이었다. 당시 고가차도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산업화 속에서 급팽창한 도시 인구를 감당하는 혁신적인 인프라였다. 가난한 나라가 ‘아시아의 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 서울의 고가도로는 101개로 늘어났다. 청계고가(옛 3·1고가도로) 사진은 해외홍보물과 가요앨범 재킷에 실릴 정도였다. 한때 통금을 위반한 택시와 시민들의 대피로가 되기도 했던 고가도로는 이제 역사 속으로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2002년 떡전고가를 시작으로 이미 15개가 없어졌다.
45세로 최고령인 아현고가도 오늘부터 철거된다. 1997년과 1999년 대대적인 수술을 받았지만 콘크리트가 벗겨지고 흔들림이 심해서 더 이상 노화를 이기지 못한 탓이다. 대신 그 자리엔 중앙버스전용차로가 들어선다고 한다.
그래도 없어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크다. 아현고가의 추억을 되새길 마지막 기회가 주어질 전망이다. 서울시가 아스콘 제거 공사 시작 전날인 이번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고가 위를 걸어볼 수 있도록 걷기행사를 연다고 한다. 굴레방다리 자리를 지나며 옛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큰 소가 길마(안장)는 모악산에 벗어놓고 굴레는 이곳에다 벗어놓고 서강으로 내려가다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는 풍수 속설까지 더듬어 볼 수 있다.
국내 최초의 고가차도라는 역사성을 감안해 교량 이름 표지판 등 상징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존할 모양이다. 철거 과정을 담은 백서도 꼼꼼하게 남긴다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약수고가와 서대문고가도 올해 안으로 없어진다지 아마.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