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일동제약 지주사전환 '태클'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려 했던 일동제약의 시도가 녹십자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에 따라 국내 상위권 제약사(녹십자 2위, 일동제약 10위) 간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커졌다.

◆일동제약 “피델리티 설득 못해”

일동제약(회장 윤원영)은 24일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기업분할 안건을 상정했으나 찬성 54.6%, 반대 45.4%로 부결됐다. 기업분할 안건은 참석 주주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다.

이날 주총에는 의결권 주식 2343만여주가 참여해 93.3%의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지분 29.36%를 보유한 2대 주주 녹십자와 기관투자가인 피델리티(9.99%)가 기업분할 안건에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확인됐다. 5%가량의 개인투자자들도 반대 의견에 합류했다.

이정치 일동제약 대표는 “피델리티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 예상했던 시뮬레이션 결과와 비슷하게 나왔다”며 “주총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윤 회장을 비롯한 최대주주(34.16%) 측과 경영진은 주총 직후 긴급 회동을 하고 향후 대응방안을 모색했다.

◆녹십자 “적대적 M&A 안 한다”

녹십자 측은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이 주주가치 제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반대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일동제약 주가는 이날 기업분할 안건이 부결된 이후 가격제한폭까지 오르며 1만7350원에 마감했다. 2대 주주인 녹십자가 지분을 추가로 확보해 일동제약 경영권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녹십자는 이에 대해 “제약업계의 관행상 적대적 M&A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녹십자 고위 관계자는 “백신 혈액제제에 강점이 있는 녹십자와 일반·전문의약품이 강한 일동제약의 비즈니스 시너지가 1차 목표”라고 설명했다. 일동제약의 기업분할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 녹십자가 제약업계 정서 등을 감안해 당분간 숨고르기에 들어갈 것으로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경영권 분쟁이 당장 표면화되기보다는 오는 3월 일동제약 정기주총에서 이사 선임 등의 안건을 놓고 힘겨루기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제약산업 구조조정 신호탄?

하지만 업계에서는 두 회사의 ‘물리적 결합’을 시간 문제로 보고 있다. 녹십자가 1년 연구개발비에 맞먹는 700억원을 투입해 일동제약 지분을 사들인 것은 궁극적으로 M&A를 염두에 둔 포석이라는 얘기다. 지난해 매출 3600억원 규모의 일동제약은 일반의약품과 전문의약품 비율이 3 대 7인 안정적인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고, 영업인력도 녹십자(500명)보다 많은 700명을 확보하고 있다. 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녹십자가 일동제약을 M&A할 경우 국내 제약산업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일동제약 지분 9.99%를 갖고 있는 피델리티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날 임시주총에서처럼 ‘녹십자·피델리티’ 연합이 M&A 과정에서 형성된다면 일동제약 최대주주(34.16%)보다 지분이 많아져 경영권 확보도 가능하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김형호/이해성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