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5'곳간만 413조원…'세계경제 성장' 그들 투자에 달렸다
지난해 9월 애플 지분 0.5%를 확보한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은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자사주 매입 규모를 늘려 막대한 규모의 현금을 투자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압박했다. 같은 해 2월 데이비드 아인혼 그린라이트캐피털 회장이 “애플은 배당을 통해 더 많은 현금을 주주들에게 환원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한 지 7개월 만이었다. 이른바 ‘기업 사냥꾼’들의 잇따른 공격에 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이 현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월스트리트가 선호하는 건 대체로 ‘주주 환원’이었다.

올 들어 이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가 월가에서 활동하는 펀드매니저 234명을 대상으로 최근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8%가 “기업들이 보유 현금을 설비투자에 사용해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주들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응답은 31%에 그쳤다. 11%는 빚을 갚는 등 기업의 재무제표를 개선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특히 응답자의 67%는 “기업들이 투자를 게을리하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2008년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로 소비가 위축되자 설비 투자를 극도로 꺼려왔다. 유럽 재정위기, 재정적자 감축을 둘러싼 미국 정치권 갈등 등 각종 정치적 불확실성도 기업 투자를 지연시켰다. 여기에 뼈를 깎는 비용 절감 노력까지 겹치면서 기업들의 보유 현금은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다국적 회계법인인 딜로이트에 따르면 S&P글로벌1200 기업이 깔고 앉아 있는 현금이 2조8000억달러(약 2987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32%의 기업이 총 현금의 82%를 보유하고 있었다. ‘빅5’는 애플(1468억달러), 마이크로소프트(807억달러), 구글(565억달러), 버라이즌(541억달러), 삼성전자(490억달러) 등이었다. 이들의 현금보유액만 3871억달러(약 413조원)에 달했다.

투자자들은 기업이 더 이상 설비투자를 늦출 경우 매출 증가가 정체돼 주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투자회사인 스탠더드라이프의 키스 스커치 CEO는 “앞으로의 경기회복과 주가상승은 기업들이 성장을 위해 현금을 얼마나 쓰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딜로이트는 금융위기 이후 적극적으로 설비투자에 나선 기업이 현금을 쥔 채 쓰지 않은 기업에 비해 매출 성장률과 주가 상승률에서 우위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투자자의 요구가 늘어나면서 기업들이 결국 설비투자에 나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빈센트 라인하르트 모건스탠리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외신기자들과 만나 “지난해 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가계 자산의 증가, 금융위기 이후 지속돼온 차입 축소(디레버리징) 완료, 각종 정치적 불확실성 해소 등의 영향으로 올해는 기업 설비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며 “이에 따라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지난해보다 0.75%포인트 정도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