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 앞두고 투자기업 릴레이 방문
비리 등 예외적 경우에만 반대표 행사
경영간섭 대신 재무적 투자자에 충실
▶마켓인사이트 1월21일 오후 4시10분
국내 최대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이 상장사 주주총회를 앞두고 이례적으로 주요 투자 기업을 잇달아 방문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당분간 의결권 행사는 자제하겠다”며 “다만 국민연금의 투자원칙과 맞지 않을 경우 주식 매각에 나설 수도 있다”는 방침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 큰손, 기업 직접 찾아간다
투자은행(IB) 업계와 주요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투자 부문 총책임자인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CIO)과 한정수 주식운용실장 등은 21일 KB금융 한국전력 등을 잇달아 찾아 기업설명(IR) 및 재무 담당 임원들과 면담을 했다.
앞서 지난주에는 신한지주와 SK 계열사 등을 방문해 재무 현황 등을 듣고 주주 가치 제고 방안 등을 협의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 책임자들이 주요 투자 기업을 잇달아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민연금은 올해 정기 주주총회 전까지 주요 투자 기업 17곳을 방문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포스코 SK하이닉스 네이버 신한지주 한국전력 기아차 LG화학 현대중공업 SK텔레콤 KB금융 롯데쇼핑 SK이노베이션 삼성화재 하나금융지주 등이 주요 대상으로 꼽힌다. 국민연금이 주식을 9000억원어치 이상 보유한 곳이다.
국민연금의 기업 현장 방문은 지난해 12월 중순 기금운용본부의 핵심 라인이 교체됨에 따라 주요 투자 대상의 현황을 점검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차원으로 업계는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대기업의 실적 변동성이 커지고 구조조정이 활발해짐에 따라 직접 해당 기업을 찾아 경영계획 등을 파악하려는 취지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기업 관계자는 “종전에는 외부에서 국민연금 투자담당 관계자들을 만났다”며 “직접 기업 현장을 찾는다고 해 다소 긴장되지만 경영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홍 본부장은 지난해 12월 기금운용본부장에 취임했고 한 실장도 승진해 국내 주식 운용을 총괄하게 됐다. 홍 본부장은 이후 국내 증권사 대표들과 면담하고 글로벌 투자 전문가인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과도 만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국민연금, 월스트리트 룰 도입?
주요 기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담당자들과의 면담에서 “당분간 (경영 참여를 하지 않는) 재무적 투자자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대기업 오너 일가의 비리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업 경영의 구체적인 안건에 반대표를 자제하겠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주식 매매 카드를 적극 활용할 수 있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민연금 수익률 개선의 취지에 반하는 경영상의 결정이 이뤄지면 주식을 팔겠다는 얘기다.
국민연금이 그동안 투자 기업 주주총회에서 반대표 행사를 본격화하면서 과도한 기업 경영 간섭이나 연금 사회주의화 논란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당분간 경영 개입보다는 수급 조절을 통한 주주 가치 제고를 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앞으로 ‘월스트리트 룰’을 적극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월스트리트 룰은 기관투자가들이 의결권 행사 대신 보유 주식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해당 기업을 평가하는 방식을 말한다. 주로 개별 투자 기업의 의결권 행사에 부담을 느끼거나 소수 지분을 가진 연기금과 금융사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실력 행사에 나선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국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월스트리트 룰 도입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앞으로 국민연금이 주식 매각에 나설 경우 개별 기업 주가에 미치는 파장이 상당한 만큼 기업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주요 기업 방문에 대해 “투자 기업 측에 귀를 기울이는 차원”이라며 “수익률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기금 운용의 원론적 입장을 전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주요 주주로 등재된 국내 종목은 현재 268개로 71조542억원 규모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