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매출 늘수록 혜택 감소…성장이 되레 두렵다"
'오냐오냐'식 중소기업 정책 '때려잡기'식 대기업 규제, 기업 도전정신 말살
“중소기업으로 남게 해달라”
경남 창원시에 있는 중소기업 A사의 D사장은 “최근 원화 강세(환율 하락)가 싫지만은 않다”고 털어놨다. 그는 “매출은 다소 줄겠지만 중소기업 지위는 더 오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충남 서산시에서 중소업체를 경영하는 K사장은 ‘자산 100억원, 종업원 50명’을 넘기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외부감사를 선임(자산 100억원 이상)하고 직원의 2.5%(종업원 50명 이상)를 장애인으로 뽑아야 하는 규제 탓이다.
경기 안산시에서 20년째 중소기업을 운영 중인 B사장은 매년 여름이면 정년퇴직이 임박한 직원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더 많은 월급을 줄 테니 비정규직으로 신분을 바꿔 회사에 남아달라고 요청한다. 비정규직은 중소기업의 기준이 되는 상시근로자 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을 꺼렸거나 그럴 의도를 가졌던 중소기업은 10곳당 3곳에 이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중소기업협력센터가 2012년 12월 제조업체 279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양금승 중기협력센터 소장은 “현실에 안주하고 성장을 회피하는 기업은 한계기업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과잉보호가 부른 부작용
중소기업이 성장을 기피하는 현상은 기업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만, 정부의 잘못된 정책 탓이 더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온갖 혜택을 ‘퍼주기’ 식으로 제공하다보니 ‘약(혜택)에 취한’ 기업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부원장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약한 기업들을 솎아내고 역량 있는 기업들에 지원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규모가 작더라도 기술 가격 품질 등 3대 경쟁력만 있으면 해외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중소기업청 등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와 금융사의 중소기업 지원 규모는 모두 171조3000억원에 이른다. 중소기업 지원 예산 10조5000억원, 중소기업청 소관 금융 및 판로 지원 154조원, 지방자치단체의 중소기업 금융지원 6조8000억원 등을 합한 수치다. 2012년 국내총생산(GDP)의 10%를 넘는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역대 모든 정부가 중소기업의 역량을 키우겠다며 각종 지원을 늘렸지만 결국 기업가정신만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중견기업들은 중기적합업종제도 등 각종 제한 때문에 힘들어한다. 한 중견기업인은 “기존 주력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3년 동안 100억원 넘게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사업에 투자했는데 중기적합업종으로 지정돼 국내에선 사업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게 됐다”며 “해외에서는 납품 조건으로 관급 공사 수주 실적을 요구하는데 난감하다”고 하소연했다.
“처음부터 자립에 초점 맞춰야 성공”
성장을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에 빠지지 않고 성공한 사례도 있다. 경기 안성시에 있는 휴대폰용 강화유리 전문기업 육일씨엔에스가 주인공이다. 이 회사는 2007년 16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이 2012년 1162억원으로 72배 이상 늘어나 ‘매출 1000억원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국내 416개 벤처기업이 매출 1000억원 돌파에 걸린 평균 기간(18년)보다 3배 이상 빠르다. 창업 당시 30여명이었던 고용 인원도 5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이 회사 구자옥 사장은 “창업 첫해에는 매출보다 많은 적자(24억원)를 내 직원들 월급날이 가까워질 때마다 잠을 못 잤다”며 “정부 지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립에 초점을 두고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었던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은 성장 아니면 퇴보의 두 가지 길밖에 없다”며 “올해 매출 목표가 2000억원인데 1조원을 달성할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릴 것”이라고 성장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특별취재팀=이건호 팀장(산업부 차장), 이태명·정인설(산업부), 이태훈·전예진(정치부), 김유미(경제부), 박신영(금융부), 정영효(증권부), 김병근(중소기업부), 심성미(IT과학부), 양병훈(지식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