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가을 단상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라디오를 진행하는, 이런 내가 좋다. 이런 약간의 재능을 내게 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주변에 나보다 훨씬 우수한 분들이 많고 더 많이 활동하는 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나, 나는 지금의 나도 딱 좋다.

집안 어른 한 분이 고위직에 있는 사람과 사돈을 맺으면서 집안에 나 같은 사람(연예인)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약간 서운했던 적이 있는데, “안 물어봐서 말 안 했겠지 뭐”라고 간단 명쾌한 답을 해주신 또 한 분의 말씀도 이해가 간다. 나는 아마 꽤 괜찮은 일을 하는 사람이면서 또 약간 덜 괜찮은 사람 축에도 끼이는 모양이다.

태어났을 때 이미 정치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집안이었고 그 광풍은 내가 스물이 되던 해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일단 우리 형제들 곁을 지나간 듯했으나, 그 덕분에 우리는 허허벌판 울도 담도 없는 곳으로 내몰렸다. 권력이란 하루아침에 인간의 얼굴에 짐승의 탈을 씌우기도 하고, 사람들은 입속에 칼을 지니고 산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가난과 처절한 외로움과 질병과 죽음의 공포, 나의 젊은 날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요즘은 대중 예술가의 위치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 속되게 부르려는 경향이 없지는 않다. 그럴 때면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말이 남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귀에 먼저 들어가 자기 귀가 더러워지나니’ 하는 격언들로 위안하기도 한다. 어떤 일이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들 스스로 민망해하기도 하고 조금은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사람은 다 그러면서 사는 것 같다.

가을, 낭만, 고독, 첫사랑 이런 단어들이 내 앞에 붙어 있어 나는 마음놓고 살도 못 찌고 옷도 늘 처량하게 입어야 할 것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좀 반듯하고 품위있는 의상을 갖추라고 조언하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그런 좋은 옷을 입는다는 게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 배반하는 것 같은 마음이 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나는 나의 그런 모습이 꽤 멋있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이런 맛으로 산다, 나는.

서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 서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고 ‘와! 와!’ 하며 막 칭찬도 해주고 특히 한 분야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약간 존경도 해주면 더 좋겠다.

최백호 < 가수·한국음악발전소장 >